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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May 05. 2023

독서의 맛

입맛을 다시며, 나는 그렇게 다짐한다.

'맛'이란 말은 참으로 맛깔나다.

입과 풍미에 관련된 것뿐만 아니라, 상황이나 사물에 대한 느낌을 말할 때에도 유용하게 사용된다.


바쁘다는 핑계로 멀리했던 책을 집어 들었을 때, 나는 바로 '이 맛'이었구나를 느꼈다.

오랜만에 마주한 종이의 촉감은 세차게 달려가던 나에게 아날로그 한 줌의 처방이 되어, 속도를 좀 줄여보라고 속삭이듯 사각거렸다. '쓰윽, 사각, 착'. 책 한 장을 넘기기가 왜 이리 쉽지 않았을까. 온갖 변명과 핑계는 단 몇 그램의 종이 한 장을 몇 톤의 무게와 같이 만드는 재주가 있다.


독서의 맛은 뭐니 뭐니 해도 '느림의 맛'이다.

역설적으로, 이 맛 때문에 책을 많이 못 읽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동영상도 2배속으로 보는 이 시대에, 가만있어도 들어오는 정보가 아니라 두 눈을 집중하여 활자를 따라가야 하는 이것은 과연 노동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속도는 참으로 답답하게 느껴진다. 그러니까 아예 책을 집어 들지 않는다.


그러나, 등산하는 것은 귀찮아도 막상 정상에 가면 올라오길 잘했다는 느낌처럼, 한 장 한 장 넘기며 닳지 않을 것 같은 페이지 수가 역전되는 걸 느끼다 보면, 왜 이 맛을 자주 보지 않을까를 되묻는다.

좀 더 자주 책을 대해야지, 아날로그로 회귀해야지, 속도를 줄여야지 마음먹는다. 그렇게 답답하다고 생각했던 속도가 표준이 되면, 세상은 무의미하게 빠르다는 걸 깨닫게 된다. 그것에 편승하여, 나라는 존재를 잊고 속도에만 치중하던 스스로가 어리 석어 보이지만 한편으론 또 안쓰럽기도 하다. 안쓰러운 마음은 연민을 일으키고, 연민은 사랑으로 승화된다. 연민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우리는 속도에 치중해 있는데, 독서는 연민을 일으키고 결국 스스로를 돌보는 거대한 지침을 주는 것이다.


나는 독서가 우리네 손톱과 닮았다고 생각한다.

언제 이 많은 페이지를 넘길까 싶지만, 손톱은 보이지 않게 자라나듯. 한 장 한 장 꾸준히 그리고 묵묵히 넘기다 보면 아무리 두꺼운 책도 끝을 맞이하기 때문이다. 전혀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은 일들도, 실상 하나 둘 이루어지고 있으며 직선으로 빨리 가려는 욕심은 오히려 시공간의 상대성이 되어 내 주위 모든 것을 더디게 만들어 버린다. 조급함을 버리면, 최적의 속도를 얻는다. 자동차도 앞으로 나아갈 때, 항상 최고 속도로만 질주하지 않는다. 다양한 속도를 구사함으로써, 자동차는 목적지에 닿게 된다.


독서의 가장 큰 맛은, 글쓰기 맛을 불러온다는 데에 있다.

읽으면 쓰고 싶다. 쓰다 보면 읽고 싶고. 쓰기 위해 읽고, 읽어야 쓸 수 있다. 이건 하나의 조합이 잘 맞는 세트와 같다. 고로, 읽는 사람은 쓰는 맛을 알고, 쓰는 사람은 읽는 맛을 안다.


오늘도 나는 독서를 할 요량에, 입맛을 다신다.

맛있는 걸 떠올리면 침이 고이듯, 마음 한 편이 촉촉해진다.


어쩐지 오늘은, 한 페이지의 무게가 톤이 아니라 그램이 될 것 같다.

꼭 그 맛을 봐야지. 꼭 읽어야지. 꼭 써야지.


입맛을 다시며, 나는 그렇게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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