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를 쏟는다. 과자 봉지 하나 제대로 뜯지 못한다. (자꾸만 미끄러지고, 비닐이 끈질기게 버티고...) 제 발에 걸려 넘어질 뻔한다. 재채기가 나오려다 영 찜찜하게 잦아든다. 가방에서 무얼 꺼내다, 날카로운 무언가에 베인다. (때론, 책장을 넘기다 종이에 베이기도 한다.) 열심히 준비한 보고서는 대차게 까인다. 아무도 없는 숲에서 나무가 쓰러졌고, 그것을 아무도 모른다면 나무는 쓰러지지 않은 것과 같다는 양자역학의 괴팍한 이론에 근거하여 대차게 까인 보고서는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버린다.
말 그대로 '난관(難關)'이다.
수많은 난관이 모처럼 하루에 모여 나에게 다가오면, 나는 과연 이 하루를 잘 버틸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든다. 왜 오늘 하루는, 왜 삶은, 왜 이 세상은 나를 못 잡아먹어 안달일까?
문득, '난관'의 뜻을 바로 보려다가, 놀라운 걸 알아내었다. '난관'의 '관'자가 '관계'라는 말의 그것과 같다. 미우나 고우나, 나를 괴롭히는 주체(누구인지, 무엇인지 모르지만...)와 대상(하루, 삶, 세상, 타인, 인생, 자연, 환경, 운명 등)이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하긴, 관련이 없으면 그러한 영향을 주고받을 일이 없지.
좋은 관계든, 나쁜 관계든.
어떠한 영향을 끼친다는 건 그 거리가 멀지 않다는 것이다.
난관은 없어야 하는 것일까?
아니다. 난관이 있음으로 해서 나는 상대와 대상을 인지한다. 인지하며 이것은 나에게 득이 되는지, 해가 되는지를 선별해 나간다. 말 그대로 생존 방식을 배워 나가는 과정이라 해도 좋다. 하나하나 난관을 지나가다 보면, 헤쳐나가는 법을 알게 되고, 헤쳐나가는 법을 알면 삶은 덜 두려워지지 않을까. 하긴, '두려움'이란 나를 지키기 위해 숙성된 불안이라는 자기 방어 기제이니까.
난관이 그득한 하루는 유쾌하지 않지만.
난관이 덜 있는 어느 다른 날로부터의 위로와, 그럼에도 잘 지나간 그것을 돌아보며 스스로를 뿌듯하게 바라볼 수 있는 조금의 여유가 오늘도 나를 숨 쉬게 한다.
난관이 오지 않기를 바라기보단.
난관을 잘 헤쳐나가길. 아무 생각 없이 지나치는 게 아니라, 난관과 나의 관계를 곱씹고 그 과정과 결과를 통해 한 뼘 더 자라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