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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Sep 14. 2024

도망친 곳에 낙원은 있을까

<스테르담 철학관>

우리는 유토피아를 꿈꾼다.

'유토피아'는 영국의 인문주의자 토마스 모어가 처음 사용했다. 1516년 발표한 소설 <유토피아>에서 이상적인 상회를 묘사하기 위해 이 단어를 만들어냈다.


그런데 유토피아는 없다. 

왜 이렇게 단언하는가. 단어 안에 이미 답이 있다. 유토피아의 뜻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장소'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유토피아는 그리스어 'ou' (없는)와 'topos' (장소)가 합쳐진 단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우리는 없는 것에 대해 왈가왈부하고 있는 것이다. 허탈하고 또 허탈하다. 


그러나,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은 부정적인 것인가?

아니다. 오히려 없는 곳에 대한 동경은 사람들을 숨 쉬게 한다. 헛된 희망도 희망이고, 희망고문으로 병들어가도 그것 또한 희망이다. 희망은 좁은 우리에 갇히는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또한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희망을 가진 자에게 손가락질할 자격을 가진 사람은 정년 없다.


누군가는 희망을 보지 못해 도망을 택한다.

도망친 곳에 낙원은 있을까. '유토피아'가 '낙원'을 뜻하는 것이라면, 나는 이미 결론을 냈다. 그 어디에도 유토피아는 없으니까. 낙원 또한 있을 리 만무하다. 그리하여 나는 '지상낙원'이란 개념을 믿지 않는다. 잠시 푸르른 바닷가 수영장에서, 코코넛에 꽂힌 빨대를 힘껏 빨아 목으로 들어차는 청량한 수분을 맛보며 느끼는, '이곳이 지상낙원이다...'라는 감동은 단 몇 초에 지나지 않는다.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그것을 두고, 지상낙원의 존재 유무를 판가름할 순 없는 노릇이다. 모른다. 죽어서 혼이 올라간 어느 곳에, 천상낙원이 있을지는.


도망친 곳에도.

도망치지 않은 곳에도.


낙원은 없다.


우리가 완벽해지려 노력할 필요가 없는 것은.

어차피 완벽할 수 없기 때문인 것처럼.


낙원을 바랄 필요도 없다.

또한, 낙원을 바라며 도망칠 필요도 없다.


어차피 낙원은 없으니까.


없다는 것에 대해 받아들이는 마음은 두 가지다.

하나는 없는 것에 대해 실망하는 것과, 또 하나는 원래 없는 것에 대한 체념과 받아들임이다.


희망을 품지 말라고 하는 건 아니나, 없는 것에 대한 지나친 기대는 내려놓기로 한다.

없는 것에 대해 인정하고, 순간이라도 스쳐 지나가는 낙원이라는 착각을 만끽하는 것이 남는 장사다. 누군지 모를 고약한 절대자가 설계해 놓은 이 세상과, 우리네 인상이라는 것에 낙원은 없다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삶의 부조리와 티격태격하며 살아가는 그 과정을 소중히 여기는 존재가 될 되자.


낙원 타령은 그만.

도망 타령도 그만.


들숨과 날숨이 있는 곳에.

나는 그저 존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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