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흘러 (사회가 정해 놓은) 나이라는 숫자가 올라가는 걸, 대개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나이를 먹는다.
나이가 든다.
참으로 흥미롭다.
'먹는다'는 본래 음식을 섭취하는 걸 뜻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변화하고 성장한다는 의미로의 확장이다. 음식을 먹고 몸이 자라듯, 경험과 지혜를 쌓고 소화하여 자아가 나아가는 모습을 제대로 표현한다. 그리하여 '나이를 어디로 먹었나?'라는 반문도 생겨났다. '든다'라는 표현은 '어떤 상태' 또는 '상태가 되는 그 자체'를 말한다. 시간이 흘러 '나이' 그 자체의 증가를 말하기도 하지만, 나이에 따라 변하는 자아의 상태와 형태까지 아우르는 표현이다.
개인적으론, '나이가 든다'라는 말을 더 좋아한다.
'나이'와 '나'의 상태를 둘 다 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표현도 좀 더 매끄럽게 들려서이기도 하다. '나이 먹고 뭐 하는 거야'란 말과 '나이 들어 뭐 하는 거야'란 말을 비교하면 후자가 (내게는) 좀 더 부드럽다.
나이는 잘 늘어나고 있는가.
나는 잘 나이 들어가고 있는가.
나이가 들며 늘어나는 건 질문이다.
나이 들어 대충 해도 되는 것들
나이가 들면 좀 더 나아질 줄 알았다.
삶이 좀 더 쉬워질 줄 알았다. 아이에서 어른이 되면, 더 지혜롭고 현명해질 줄 알았다. 그게 아니었다. 나이가 들며 완벽에 가까워지자고 노력했던 모든 것들은 허무하기 짝이 없고, 오히려 깨달은 건 (어차피 완벽할 수 없으니) 완벽하려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완벽하지 않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방법을 터득하는 게 더 중요하다.
운동을 잘하려면 힘을 빼야 한다.
어느 운동이든 마찬가지다. 삶도 운동이라면, 힘을 좀 빼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다 문득, 나이 들어 대충 해도 되는 것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완벽과 함께 잔뜩 경직된 삶의 근육을 풀면서다.
첫째, 비교
우리는 싫으나 좋으나 비교의 민족이다.
공동체 생활을 해 온 집단적 무의식의 힘은 실로 강하다. 요즘 세대라 하더라도, 이러한 집단 무의식의 힘을 피해 갈 수 없다. 나보다 잘 나가는 사람, 돈 많은 사람, 좋은 집과 차를 타고 더 맛있는 음식을 먹는 사람. 대개의 삶의 불행은 비교에서 온다. 반면, 끈기와 오기도 비교에서 온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치열하게 비교한 건 불행을 위해서였다.
이제 비교는 대충 하려 한다.
굳이 비교하자면. 끈기와 오기, 발전을 위한 비교에 좀 더 힘을 실으려 한다.
둘째, 폭식
나이가 드니 예전만큼 먹질 못하겠다.
그런데, 아직도 마음은 스스로를 착각하여 생각보다 많은 양을 먹으려 한다. 100미터를 10초 안에 달릴 수 있다고 착각하며, 마음은 저만치 몸은 요만치로 움직여 홀로 자빠지는 모양새와 다르지 않다. 자장면 한 그릇만 먹어도 하루 종일 더부룩한데, 탕수육과 짬뽕을 다 먹고 싶다는 마음은 왜 자꾸 생겨나는 걸까.
(많이) 먹는 건 대충 해도 된다.
몸에 해로울 만큼 굶거나, 영양가 없는 걸로 때우자는 게 아니다. 대개의 폭식은 오히려 스스로를 돌보지 않는 마음이나, 불안에서 온다.
폭식은 대충 하고, 나에게 맞는 양이 무엇인지... 내 몸과 마으의 상태는 어떠한지에 대해 집중해야 한다.
셋째, 험담
우리는 남 이야기 하는 걸 좋아한다.
그게 좋은 말이든, 그렇지 않은 말이든. 두 사람 이상이 모이면 다른 사람 이야기를 하곤 한다. 대개는 험담이다. 고백하건대, 나 또한 좋은 말보단 험담을 더 많이 했다.
그런데 생각이 바뀌었다.
나이 들며 얻은 경험은, 내가 한 험담은 더 큰 허물이 되어 돌아온다는 것이다. 돌고 돌고 돌고... 시간 차이일 뿐 결국 어떠한 응보로든 돌아온다. 드라마의 한 주인공이 부메랑을 날리며 사랑은 돌아오는 것이라고 소리쳤다면, 나는 부메랑을 날리며 험담은 돌아오는 거야...라고 소리칠 것이다.
험담은 대충.
아니, 아예 줄이고 칭찬을 늘리고 있다. 아무리 싫은 사람이라도 타인의 장점에 집중하다 보면 분명 보이는 것들이 있고, 칭찬해 낼 수 있는 내가 된다.
넷째, 불안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사람들은 불안을 경계한다. 불안해하는 자신을 불안해한다. 나라고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글을 쓰게 되면서 불안을 찬찬히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불안이 꼭 나쁜 것일까?
'불안'은 편하지 않은 마음을 말한다. 그 상태를 말한다. 재밌는 건, 내가 어떤 의지를 다지고 실행에 옮기는 그 순간엔 언제나 불안이라는 마음이 있었다. 즉, 마음이 편치 않으니 무언가를 해내는 힘. 마음 편하면 사람은 게을러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너무 큰 불안은 '기우(杞憂: 중국 기 나라에서, 어떤 사람이 하늘이 무너지지 않을까 하고 침식을 잊고 걱정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며, '쓸데없는 걱정'을 표현하는 말이다. - 작가 주 -)를 양산해 낸다. 그게 긍정적 에너지로 승화하면 좋겠지만, 불안하여 아무것도 하지 못하면 문제가 있다.
대충, 적당히 불안해하는 건.
그러니까, 나를 스스로 걱정하고 보살피되 그것에 압도되지 않고 그래서 지금 무언가를 해낼 수 있는 에너지로 사용하는 지혜를 말한다.
다섯째, 자책
젊은 날엔 왜 그리 자책했을까.
왜 스스로를 못살게 굴었을까. 괴롭히고 상처 주고. 목표는 저만치 세워 놓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나를 후들겨 패기만 했지 왜 이룰 수 없는 목표를 세웠는지에 대한 항변은 하지 못했다.
나이가 들어 이젠 좀 알겠다.
자책은 대충. 반성은 깊게.
에너지를 쏟아야 한다면, 그건 '자책'이 아니라 '반성'이다.
둘은 엄연히 다르다. 반성은 스스로를 돌보고 앞날을 다시 도모하는 것이다. 자책은 스스로에게 폭력을 가하고 그대로 주저 않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