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르담 페르소나 글쓰기>
심리학을 공부하고 싶었던 이유는, '나라는 사람'과 '타인'을 잘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전공으로 심리학을 택하면, 그리고 공부하면,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린 마음이었다. 세상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표면에 그친 수박 겉핥기식 발상이었다.
이후, 심리학 공부보다 더 사람에 대해 이해할 수 있었던 장(場)은 바로 직장이었다.
인간 군상의 천태만상. 그러나 이마저도, 거르고 걸러 들어온 사람들의 도발적인 행동이므로, 어찌 보면 직장 밖의 어떤 사람들은 해괴할지 모른다. 상식의 선을 넘는 사람들, 아니 상식 그 자체가 없는 사람들도 허다하다. 이것을 학문으로, 전공으로, 공부로 가늠할 수 있을까.
심리학을 공부하며 깨달은 하나는, 타인을 이해하고자 했던 마음과 그것을 재단하려 했다는 오만함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나 조차도 잘 모르기 때문이다. 내 마음의 변덕을 알지도 못한 채, 다른 사람들의 이상함과 괴상함을 논할 수 있을까. 그러하지 않다. '나 자신' 또한 남에게는 '타인'이며, 나에게 조차 스스로가 타인처럼 느껴질 때도 분명 있다.
삶은 갈수록 쉽지 않고.
정답은 없다고 느껴지는 대부분의 이유를 돌이켜보면, 이는 사람들과 연관되어 있다. 가까운 사람의 배신, 멀리 있는 또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의 도움. 선한 사람을 아무런 이유 없이 해하는 사람, 악인이라도 도움의 손길을 주고 보는 마음 착한 사람.
이 세상의 정의는 무엇이고, 누가 현자이고 누가 악인인지 가늠하기가 좀처럼 쉽지 않은 시대.
그러할수록 사람에 대해 공부해야 하는데, '인문학'은 지식의 수준을 가늠하는 학문으로 전락한 지 오래고, 인공지능으로 사람의 생각을 효율화(라고 쓰고 최소화라고 읽는다.) 한답시고 사색의 시간을 줄이는 지금의 순간들이 허망하기도 하고 감히 걱정되기도 한다.
사람에 대해 이해할 수 있던 장이 직장이었다면.
나에 대해 더 많이 이해할 수 있었던 도구는 바로 '글쓰기'다.
글을 통해 나는 스스로에게 한걸음 더 다가갈 수 있었다.
글을 쓰기 이전엔, 다가갈 마음도 없었다. 나를 모르는데 남은 온갖 잣대로 판단하며 살았으니 삶이 얼마나 고되었을까. 아직도 다는 모르겠지만, 나 자신을 좀 더 잘 알게 되니 타인의 많은 것들이 용인되고 이해가 된다. 그러하니 타인과의 관계가 개선되고, 자극과 반응 사이에 더 많은 시간을 부여하여 실수를 최소화한다.
쓰면 쓸수록.
글쓰기의 최종 목적은 '사람 읽기'란 생각이 든다.
읽으려면 써야 한다.
무언가가 활자화되어 있어야 한다. 글쓰기는 내 생각과 마음, 느낌과 영혼을 그나마 제일 잘 나타내어주는 훌륭한 도구다. 활자에 모든 걸 담아낼 순 없지만, 이마만큼 나 자신을 담아낼 수 있는 방법도 딱히 없다. 최선이든, 차선이든. 어찌 되었건 나 자신을 이처럼 효율적이고 사실적으로 담아내는 다른 수단을 나는 알지 못한다. 있다면, 글쓰기를 포기하고 그것에 돌진할 것이다.
글을 쓰며 접어드는 사색의 여정은 또 하나의 선물이다.
앞서 글쓰기는 수단이라 말했다. 그러하다면 그 수단을 다루는 주체는 나 자신이며, 내가 스스로 생각하고 사색하며 써 나아가는 글쓰기의 과정이 가장 큰 목적인 것이다.
사람 읽기.
가장 먼저 읽어야 할 사람은 바로 나.
오늘도 멈추지 않고 쓰는 이유다.
[소통채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