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몰랐던 이야기
네덜란드 저 북쪽 Texel 섬을 다녀온 시간은 오후 9시가 다되어가는 때였다.
밤 9시라고 하기에는 네덜란드의 햇살이 밝아 오후로 칭하는 것이 더 어울린다. 내일 먹을 음식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우리 가족은 집 근처에 있는 마트에 가기로 했다. 무려 밤 10시까지 오픈한다. 그것도 토요일 주말에. 밖이 환하긴 하지만 그래도 다른 유럽에서는 자주 볼 수 없는 풍경이다. 네덜란드 사람들의 '실용', '실리'적인 면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네덜란드도 개인의 삶이 더 우선이기 때문에 서/북유럽 특유의 '불친절'함이 있다. 예를 들어 점원을 불렀을 때, 그들이 할 일이 있다면 기다려야 한다. 우리나라처럼 만사 제치고 달려오길 기대하는 것은 금물이다. 그럼에도 다른 유럽보다는 뭔가 더 신속한 편에 속한다. 우리네 눈에 좀 더 빠르단 이야기. 그래서 네덜란드가 더 좋은지 모르겠다.
마트에 들어서 장을 보던 때, 첫째가 갑자기 바나나 하나를 집어 들어 그것을 까고 있었다.
아직 계산도 안 한 걸 까다니. 화들짝 한 나는 첫째에게 다가가 이걸 까면 어떻게 하냐고 애써 담담한 척하고 물었다.
"아빠, 이거 먹어도 돼요!"
응? 입간판에 뭐라고 쓰여 있는 글자가 왠지 첫째 녀석의 그 말을 뒷받침해주는 것 같았다. 그래도, 확실히 하기 위해 전화기를 들어 카메라로 읽어주는 번역기를 들이밀었다. 연신 초점을 맞추던 번역기는 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20대의 건장한 점원이 다가와 번역이 필요하냐고 묻는다. 어린이들을 위한 바나나와 만다린. 그러니 먹어도 된다고 한다. 그러더니, 한 술 더 떠 여기 있는 것은 상태가 많이 좋지 못하니, 새것 하나를 주겠다고 하며 잽싸게 저기 바나나 코너에서 새것 하나를 갖다 주고는 미소와 함께 사라졌다. 멍하게 서 있다가 번역과 친절을 콤보로 당한 느낌이 좋기도 하고 얼떨떨하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유럽 다른 나라 여행을 다닐 때 마트를 들리곤 할 때면, 이러한 코너를 몇 번 본 적이 있다는 기억이 떠올랐다. 그리고, 바쁘다는 핑계로(사실이긴 하지만) 마트를 자주 오지 못하다 보니, 살고 있는 네덜란드에 이런 것이 있다는 걸 몰랐던 것이다. 나만 몰랐던 이야기. 그럼에도, 그 청년과 같은 친절한 번역과 새로운 바나나를 가져다주는 배려는 네덜란드이기에 가능한 것임을 나는 알고 있었다.
바나나를 맛있게 먹으며 다시 장을 보는 아이들의 뒷모습에서, '아빠는 바쁘니 뭐 모를 수도 있죠!'라는 여유 있는 글귀를 느낄 수 있었다. 그것도 모르냐는 핀잔이 없었기에 스스로 느낀 위로 아닌 위로. 마트 안의 시원함, 네덜란드의 친절과 배려, 그리고 가족들의 즐거운 모습이 눈 앞에 펼쳐진, 정말 기분 좋게 화들짝 할만했던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