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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Oct 10. 2019

[쪽 소설] 대신 뛰어 드립니다.

동의하십니까?


보기만 해도 딱딱한 문장과 알아들을 수 없는 조항들을 읽은 참가자들은, 고개를 잠시 갸우뚱하나 싶더니 서명란에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여러분은 선구자입니다. 시대를 앞서가는. 이 실험 참여를 통해 누구보다 먼저 신박한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자부심을 가지세요!"

하얀 가운을 입은 연구원이 자신 있게 말했다. 눈을 덮은 큰 고글엔 푸른빛이 감돌았다.


그리곤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자, 이쪽으로 와서 머리에 쓰는 텔레 머신과 온몸을 지탱해주는 특수 슈트를 받아 가세요. 집에 가서 전원을 연결하고 그저 온몸을 맡기시면 되는 겁니다. 그럼 우리 '대신 뛰어 드립니다' 상품의 효능을 직접 느끼실 수 있습니다. 누군가 여러분을 위해 뛸 거고, 그 소모되는 칼로리는 고스란히 당신에게 전해져 살이 빠지게 되는 거죠. 다이어트 효능만 있는 게 아닙니다. 심폐능력 개선은 물론, 직접 운동하는 효과를 100% 전달받을 수 있습니다. 그것도 가만히 누워서 말이죠!"




K는 반신반의하며 텔레 머신과 슈트를 받아 들고 집으로 왔다. 

안 그래도 요즘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이것저것 먹느라 살이 많이 불어난 참이다. 전원을 연결하고 텔레 머신과 슈트를 장착한 K는 반듯이 누웠다. 휴대폰 앱에서 자신 대신 뛰어줄 사람을 골랐다. 운동으로 다져진 탄탄한 몸을 가진 젊은 여성. 1시간 코스로 정했다. 준비운동도 충분히 해달라고 했고, 특히 뱃살이 많이 빠지도록 최선을 다해달라고 했다. 그리곤 잠시 눈을 감았다.


"삐리릭, 삐리리릭"

K는 알람 소리에 눈을 떴다. 온몸이 땀범벅이었다. 정말 온몸이 1시간 동안 운동한 것처럼 뻐근했다. 기분은 좋았다. 운동하고 난 뒤의 보람과 상쾌함까지. 그것들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체중계에 올랐다. 약 700그램이 빠져있었다. 기뻤다. '대신 뛰어 드립니다'의 상품을 신뢰하게 되었다. 곧바로 인터넷에 접속하여 후기를 남겼다. 대박이라는 말과 함께.


회사는 승승장구했다. 

그 효과가 전해지니, 어디에 내다 놓기만 하면 팔려 나갔다. 매장은 물론, 온라인부터 홈쇼핑까지. 공장에서 찍어내는 족족 재고는 소진되었다. 대기 인원수만 20만 명을 넘어섰다.




"자, 이제 '대신 뛰어드립니다'를 이 세상에 소개하고, 인류에게 혁신을 안겨다준 대표님의 기자회견이 시작되겠습니다. 모두 자리에 착석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장내 아나운서가 어수선한 청중을 바라보며 말했다. 두 번 걸쳐 세 번까지. 점점 더 또랑또랑해지는 목소리는 사람들을 각자의 자리에 앉히기에 충분했다. 


조용한 가운데 모두의 시선은 무대 위를 비추는 조명에 고정되었다. 

갑자기 무대에서 먼 어느 방향에서 관객들이 웅성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당당한 걸음, 잘 차려입었지만 무겁지는 않은 옷. 누가 말하지 않아도 그가 대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무대 위에 있던 핀 조명이 그의 발이 닿는 곳을 따라 비추었다. 30대 중반의 키가 그리 크지 않은 사내는, 자신감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대신 뛰어 드립니다' 대표 R입니다. 어떻습니까. 우리 제품이요. 쓸만하지 않습니까? 만족하신다면, 정말 인류 역사의 한 획을 긋는 제품이라고 생각하신다면 박수를 쳐주십시오!"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전 세계에서 생방송 SNS로 그 광경을 지켜보는 사람들도 박수를 쳤다. 어떤 사람은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몸소 그 효과를 겪은 사람들은 너도나도 그 효능을 떠들어댔다.


대표의 뒤로, 큰 전광판에 사람들의 사용기가 담긴 동영상이 재생되었다. 

슈트를 입고 잠시 잠들었을 뿐인데, 일주일 만에 살이 5kg이나 빠졌다는 사람. 세상 편하게 폐활량을 늘리고 건강을 되찾았다는 사람 등. 신세계를 맛본 사람들의 황홀경에 관한 이야기가 연이어졌다.


"자 어떻습니까. 우리 제품을 신뢰하게 되었나요? 아 신뢰를 넘어 사랑을 하게 되었다고요? 좋습니다! 우리는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더 혁신적인 제품을 들고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대신 뛰어 드립니다'의 판매 열기는 식을 줄 몰랐다. 

아니, 더 뜨거워져 걷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는 동안 '대신 뛰어 드립니다'를 만든 회사는 주체할 수 없는 돈을 벌어 들였다. 새로운 연구개발이 이루어지고, 그곳에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부었다. 사람들은 '대신 뛰어 드립니다'에 점점 더 빠져들었다. 먹고 싶은 것을 실컷 먹고는 '대신 뛰어 드립니다'의 슈트로 기어들어갔다. 이제 사람들은 '대신 뛰어 드립니다' 없이는 살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정확히, 3년 후.

대표 R은 신제품 출시를 위한 소개를 위해 무대에 섰다.


"오늘, 이 자리에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갈 새로운 제품을 소개하려 합니다. '대신 뛰어드립니다'는 우리 상상력과 기술의 시작일 뿐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대표 R이 한 문장을 끝내면, 그것에 맞추어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자, 소개합니다!, '대신 뛰어드립니다'의 후속 시리즈! '대신 생각해 드립니다', '대신 사랑해 드립니다', '대신 꿈꿔드립니다', '대신 살아 드립니다'"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마치 구원이라도 받은 듯 환호를 하며 소리치고 손뼉 쳤다.

이제 그들은 그저 특수 슈트 안에 몸일 맡기고 잠만 자면 되는 것이다. 그럼 누군가 대신 뛰어 주고, 대신 생각해 주고, 대신 사랑해 주고, 대신 꿈꿔주는. 말 그대로 누군가 나를 위해 '편리하게도' 대신 살아주는 세상이 온 것이다.


대표 R은 자신의 발명품이 고객들에게 세상 둘도 없는 가치와 편리함을 제공해줄 것이라며, 웃었다.


그 웃음은 환하면서도 섬뜩한 무엇이었다.




'직장내공' (나를 지키고 성장시키며 일하기!)

'오늘도 출근을 해냅니다' (생각보다 대단한 자신을 만나고 싶다면!)

'진짜 네덜란드 이야기' (알려지지 않은 네덜란드의 매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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