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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Mar 24. 2019

[쪽 소설] 소년의 기억

삶은 그렇게 흘러간다. 누구에게나. 아무렇게나.

새벽 6시가 채 안 된 시간이었다.

잠을 자던 소년은 누군가의 손으로 머리를 크게 가격 당하며 잠에서 깨었다. 아프지 않았다. 다만, 정신이 멍했다. 얼떨떨하면서도 부스스 가까스로 눈을 뜨고 있는데, 손은 몇 번 더 날아왔다. 뺨과 등짝, 머리 어디를 가리지 않았다. 바르르 떨던 소년은 그저 맞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유는 몰랐다. 하지만, 맞아도 이상할 것이 없는 그저 그런 일상이었다.


상황이 조금 진정되었을 때, 소년은 아무렇게나 켜진 TV를 곁눈질로 봤다.

아침 6시 5분. 한참을 맞은 것 같았는데 시간은 단 몇 분이 흘렀다. 처음 맞기 시작한 시간이 6시가 채 안되었었다는 걸 가늠하기에도 충분했다. 방 한 구석에 앉은 소년은 생각에 잠겼다. 오늘은 무슨 일일까. 왜라는 생각은 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리고 어디를 아파할 여유도 없었다. 다만, 그 손이 더 날아오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손의 주인은 어미였다.

어쩌면 그래서 소년은 반항하지 않았을 터였다. 저를 낳아준 어미가 아빠 없이 힘겹게 저를 키우고 있단 걸 알았기에 그 상황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기특하면서도 미련하고, 가련하면서도 처절했다. 훗날, 아마도 소년은 그 이해의 정도를 좀 더 높일지 모른다. 한 여인네가, 남편 없이 아이를 키우느라 밤새 고단한 일을 하고 돌아오면 무엇이고 행복해 보일 단서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 소년은 아직 소년이었다. 때리면 맞았지만, 한 여인의 굴곡진 인생사를 이해하기란 불가능했다. 다만, 그 손은 저 자신을 먹이고 입히고 키운 손이므로 따뜻했다. 저와 상관없는 손이었다면 반항했을 것이고, 부엌에 있던 칼로 무슨 일을 저질렀을지도 모른다. 제 어미와의 좋은 기억으로 소년은 그 아픈 시간을 버틴 것이다.


사과는 없었다.

소년도 그것을 바라진 않았다. 다만, 조금은 진정된 목소리로 옷 입고 학교 가라는 제 어미의 말에 조금은 안도했다. 더 이상 손이 날아오지는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 TV 아래 놓인 작은 3단 서랍장. 양말을 꺼내려 맨 위 서랍을 소년은 열었다. 뚝뚝... 서랍 어느 한 면과 속옷이 포개져 있는  안으로 무언가가 떨어졌다. 소년의 피였다. 아직도 머리가 얼얼한 소년의 코는, 뜨겁고 끈적한 액체를 사정없이 뿜어내고 있었다. 아직, 초등학생이 등교하려면 너무나 이른 새벽 6시 25분의 일이었다.


어미는 털썩 주저앉았다.

손을 벌벌 떨면서, 자신이 한 일에 대해 돌이켰다. 소년의 코피를 닦아 줄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그저 엎드려 어미가 오열하는 동안, 익숙한 듯 소년은 고개를 뒤로 젖혀 휴지를 찾았다. 아무 일 없다는 듯 코피를 닦았다. 오열하는 어미를 위로할 순 없었다. 지금 그 소년은, 자신의 코피를 먼저 닦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어미가, 저의 코피를 보고 오열한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오히려 자신이 코피를 흘리지 말았어야지 생각하며, 어미를 피해 집을 일찍 나섰다.


소년은 불행하다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행복하단 느낌도 들진 않았다. 소년은 생각했다. 저 자신에게는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를. 터벅터벅 걸어가는 소년의 머리는 감지 못해 뻗쳐 있었고, 싸늘한 공기는 제대로 옷을 챙겨 입지 못하고 나온 소년의 체온을 떨어뜨렸다. 신발주머니는 온 데 간데없었고, 시간표에 맞추지 못한 다른 교과서가 가득한 책가방만이 등 뒤에서 들썩였다. 미래가 보일 상황은 아니었다.


아마도 그 소년의 사정을 아는 사람이 지나갔다면, 소년을 멈춰 세워 꼬옥 안아줬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각자의 삶에 지치고 바쁘고 고된 사람들은 발걸음을 재촉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삶은 그렇게 소년에게나, 어미에게나, 어른에게나, 누구에게나 아무렇게나 흘러간다. 그저 각자의 짐을 짊어지고 살아가야 하는 운명. 짊어진 어깨가 으깨어지고 짓눌려도, 그 짐을 누구에게 벗어줄 수 없다는 걸 소년은 겨우 초등학생이 되어서야 깨닫게 된 것이다. 좀 더 빨리 그것을 깨달았다면 삶이 좀 더 나아졌을까?


아니다.

언젠가 알아야 할 삶의 무게라면, 가능한 뒤늦게 깨닫는 것이 좋다고 소년은 생각했다. 아직, 꿈꿀 날이 많았으므로. 아직 갖고 싶고 먹고 싶은 게 많았던 나이였으므로. 아직, 사랑받아야 할, 사랑이 고픈 나이였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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