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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Sep 26. 2018

그래, 행복은 표현하는 거야!

알려줘서 고마워!

"저, 지금 너무 행복해요!"


대단한 건 아니었다.

추석 연휴를 틈 타, 아이들과 함께 놀이동산으로 향하던 길이었다. 긴 연휴, 집에만 있으면 흐지부지 될 것 같아 갑작스럽게 한 결정. 하지만, '놀이동산'이란 결정은 언제 어느 때 해도 아이들에겐 즐거움일 것이다. 차 안 뒷자리에서, 기쁨을 주체하지 못한 아이들이 너무 행복하다는 말을 연신 뿜어댔다.


'기분이 좋으면 행복한 걸까?'

아이들에게 '행복'이 뭘까란 질문을 하려다 참았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난 '행복'을 너무 무겁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분이 좋아서 그렇든, 아니면 어떤 감정을 느꼈든 간에 입에서 '행복'이란 말이 튀어나왔다면 그건 묻지도 따지지도 않아도 될, 말 그대로 '행복'인 것이다. 기분에 따라 '행복'이 너무 가볍게 왔다 갔다 하는 건 아닐까란 생각을 한 나 자신이 우스웠다. 아이들의 얼굴엔 '행복'이란 글자가 쓰여 있었다. 그럼 된 거였다.


돌아보니, 난 행복하길 바라면서 '행복'이란 단어를 쓴 적이 별로 없었다.

'표현'하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면에선, 아이들은 나보다 월등하다. '표현'을 잘한다. 상황에 맞추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과 마음에 따라 그것을 내뱉는다. 필터를 거치지 않은 그것은 '솔직'하다. '행복'이란 말을 갖다 붙여도 될까 하는 나와는 다르다. 좋으면 좋은 것이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그 마음이 크더라도 '표현'해야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사랑해'라고 말하는 것이다. 나의 눈빛이나 행동 하나를 보고 미루어 짐작해달라는 건 한계가 있다. 선물을 주거나, 시간을 할애하는 것도 일종의 사랑 표현이지만 그것만으론 헷갈린다. 반드시 '표현'해야 한다.


"아이들에게서 배우는 '행복'"


"와, 우린 지금 천국에 있어요! 너무 행복해요!"

무더운 여름, 바다로 여행 간 그곳에서 에어컨이 켜진 시원한 숙소로 들어갔을 때 아이들은 외쳤다.


"난, 아빠가 끓여주는 라면이 정말 맛있어요.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정말 행복해요!"

일요일 아침, 와이프가 잠든 사이 배고프다며 달려온 아이들에게 라면을 끓여 주었을 때도.


"너희들에게 '행복'은 뭐야?"

"우리 가족이랑 함께 하는 거요. 뭐, 여행도 가고 맛있는 것도 먹고!"

유럽 여행 중 어느 길목에서 나의 '우문'에 '현답'을 한 아이들.


돌이켜 보니, 아이들은 연신 '행복'을 표현하고 있었다.

과자 하나를 먹을 때도, 아이스크림을 한 술 뜰 때도. 주말 아침에 그 좋아하는 축구공을 같이 찰 때도.


참 고마웠다. '행복'을 느껴줘서. 그리고 그것을 '표현'해줘서.

'행복'은 그리 무겁고 큰 개념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해줘서.


물론, 우리 아이들도 커가면서 '행복'에 대한 많은 고민을 하게 될 것이다.

'행복'이란 것이 단순한 마음 상태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어느 정도'의 경제력이 있어야 행복을 느낄 가능성이 더 높고. '어느 정도'를 이루는 것이 생각보다 훨씬 더 어렵다는 것. '소확행'이란 개념을 배우고, 그것이 얼마의 체념과 함께 발전한 '행복'의 또 다른 종류라는 것도.


네덜란드에서 4년 넘게 살면서 깨달았던 건, '행복'이란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것'이었다. 

수치로도 우리나라보다 한 참을 앞 선 네덜란드 사람들의 삶은, 이방인인 나에게 그래 보였다. 누군가와 비교해서 얻는 '더 행복함 or 덜 불행함'이 아닌, 내가 만족하고 기분 좋으면 된다는 '행복함'이었다. 나는, 그래서 우리 아이들이 자신만의 절대적인 '행복함'을 많이 느끼고 찾아내었으면 한다.




'내가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걸까?'

'행복'을 맞이했을 때의 내 모습이다.

그것의 고점에서 내려올 순간에 대한 걱정, 앞으로 이와 같거나 더 좋은 상황을 맞이할 수 있을까란 불안감.


솔직히, 난 이번 생에선 '행복'을 절대적으로 마음껏 누리긴 글렀다. 

한국인의 기질 때문인지, 아니면 어려서부터 고군분투해 온 삶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건, 아이들이 '행복'하다는 표현을 하면 나도 같이 '행복'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행복'을 많이 느끼게 해주고 싶다. 나의 '희생'이 있더라도 말이다. 아이들에게서 그렇게 '행복'을 배웠으니, 내가 조금 더 '희생'하더라도 괜찮지 않을까. 내가 느낀 '행복'도 나를 낳아 주시고 길러주신 분들의 '희생'에 의한 부분도 분명 있을 테니. 


그러고 보니, 기꺼이 '희생'할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도 분명 '행복'의 요소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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