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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Nov 03. 2018

사춘기(社春期)

질풍'노'도(疾風'勞'濤)의 시기

사춘기(思春期)

인간 발달 단계의 한 시기로, 신체적으로는 이차 성징이 나타나며 정신적으로는 자아의식이 높아지면서 심신 양면으로 성숙기에 접어드는 시기

- 어학사전 -


돌이켜보건대, 나의 사춘기는 별 일 없었다.

하지만 어머니 앞에서 이 말을 했을 때, 어처구니가 없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시던 기억이 생생하다. 내가  행동은 당연한 것이었고 기억할 만큼 특별한 것이 아니었는데, 어머니에게 그것은 태산과 같은 근심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솔직히, 우리 아이들에게 다가올 사춘기가 나는 두렵다.


나는 이러한 '질풍노도의 시기'를 인생에 단 한 번만 겪으면 되는 줄 알았다.

신체는 이미 그 성장을 멈추었고, 정신적으로 더 나아질 것이 없을 거라던 그때. 나는 입사를 했고 직장인이 되었다. 그리고 '사춘기(思春期)'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사춘기(社春期)'를 맞이했다.


그 둘은 확연히 다르다.

신체는 성장했으나 정신은 아직 성숙하지 않은 '사춘기(思春期)'는 어느 정도 사회적인 용인을 얻는다. '모라토리엄'. 즉, '지급유예 기간'이라고 불리는 이유다. 누구나 이 과정을 거쳐왔기에, 이해하는 정도가 크다. 치기 어린 행동을 하거나, 큰 잘못을 하더라도 웬만하면 용서를 받는다.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기다려 주는 것이다.


이에 비해 직장인이 되어 회사에서 맞이하는 '사춘기(社春期)'는 애처롭다.

사회생활을 하며 오만가지 일을 당하고 겪으면, '사춘기(思春期)'에 어렵게 확립한 정체성은 붕괴된다. 게다가, '사춘기(思春期)'의 방황을 그대로 답습했다간 밥줄 끊긴다. 정체성을 찾을 때까지 사회는, 회사는 기다려주지 않는다. 반항도 한 번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질풍노도의 시기를 견뎌야 하는 것이다.


마치, 더 성장할 것이 없는 신체를 키우기 위해 사지를 묶어 잡아당기는 고통과 같다.

그리고 더 무서운 건, '사춘기(社春期)'는 반복된다는 것이다. 좁은 취업문을 뚫고 직장생활을 함과 동시에 나는 제대로 살고 있는지에 대한 회의와, 아니라면 빨리 뛰쳐나가야 한다는 조급함이 엄습한다. 그리고 이것은 주기적으로 '슬럼프'라는 이름으로 (친근하게) 찾아온다. 그것을 이겨내기 위한 답은 없다. 달고 살아야 하는 직장인의 '지병'이라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맘 편하다.


그래서 나는 '사춘기(社春期)'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사춘기(社春期)

인간이 먹고살기 위해 일을 해야 하는 시기로, 신체적으로는 배가 나오거나 건강이 나빠지는 과정을 겪으며, 정신적으로는 자아의식이 흔들리면서 심신의 맷집이 성숙해지는 시기


하지만, 난 사춘기의 '춘'이 '봄'을 뜻한다는 걸 잊지 않을 것이다.

겉으로 들리는 어감은 문제 투성이의 복합체 같지만, 그 뜻을 가만 보면 봄을 기약하는 생각과 때를 일컫는다. 얼마나 위안이 되는지. 언젠간 봄을 맞이하리라는 막연한 바람은, 그야말로 위로다. 그것이 설령 오지 않더라도 말이다.


초라하다고 생각하면 직장인의 초라함은 한도 끝도 없지만, '봄'을 기약하고 기다릴 줄 아는 존재라 생각하면 조금은 더 견딜만하다.


그래서 난 오늘도 '질풍노도(疾風怒濤)'의 그 조류를 그냥 타보려 한다.

질풍'노'도(疾風'勞'濤), 맡게 된 '일'을 열심히 그리고 잘 하면서.


그 누구도 아닌 나의 성장과 보람,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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