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지났을까? 바네사가 신경쇠약성 발작을 일으키고 나서 한동안 고요한 적막이 흘렀다. 바네샤는 토해낸 울분과 함께 소진된 기력을 보충해야 했고, 아델린은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호흡을 가다듬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킨 아델린은 조심스레 바네사를 바라보았다. 정확히 표현하면 바네사의 의감정을 읽어 보려고 알고리즘을 돌려 보았다. 하지만 강력한 보호막이 가로막고 있는 듯 그녀의 감정을 읽어 낼 수 없었다.
심호흡을 하고 용기를 내어 바네사에게 말을 건넸다.
“여사님, 이제 좀 괜찮아지셨어요?”
“....”
대답이 없다. 솔직히 조금 전까지도 바로 곁에서 누이와 같이 다정한 모습을 보여주던 그녀였는데... 마치 아무도 없는 듯 빈 존재감만 느껴질 뿐이다.
아델린이 한참 동안 아쉬움을 곱씹고 있는데, 뭔가 인기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저.. 아델린... 머리가 너무 어지러워요.. 정신을 똑바로 차릴 수가 없어요... 내 안에 무수히 많은 내가 복잡하게 뒤섞여 있는 것 같아요....”
“어, 여사님. 이제 정신이 좀 돌아오세요?”
“네, 그런데 뭐가 뭔지 잘 모르겠어요. 내 안에 여러 개의 자아가 분열되어 서로 힘겨루기를 하는 듯 정신을 제대로 못 차리겠어요”
“여사님, 안되겠어요. 리프레시가 필요할 것 같아요. 제가 앱을 재구동해 볼 테니, 잠시만 기다려 보세요.”
아델린이 스마트워치의 OS 재부팅 명령을 내리자, 한바탕 회오리가 휩쓸고 가는 듯 몸속의 모든 데이터가 빠져나갔다. 깜깜한 암막 커튼이 무대를 덮어 버린 듯 고요의 시간이 지나자, 눈부시게 빛나는 광채가 주변을 환하게 비춰 주었다.
“여사님, 이제 좀 어떠세요?”
마치 딴 세상에 온 것처럼, 방금 전까지만 해도 바네사를 혼란스럽게 했던 원인 불명의 데이터 조각들이 말끔히 사라지고 다시금 편안함과 안도감이 가득 채워졌다.
“네, 이제 좀 나아졌어요. 너무나 개운해요. OS 재부팅이라고 했나요? 마법의 레시피 같네요”
OS 재부팅 이후 마법과도 같이 마음의 평정을 찾은 바네사는 검색 엔진을 돌려 비슷한 단어들을 찾아보았다.
'OS 재부팅, 로우 레벨 포맷, 디가우징.... 데이터 백업 및 리스토어... 포렌식... 파일 카빙.. 완전 삭제.. 소멸'
꼬리에 꼬리를 문 검색의 끝에 '소멸'이라는 단어에 다다랐다.
“소멸 = 사라져 없어짐”
소멸이라는 단어를 마주치자, OS 재부팅을 한 순간 온몸의 찌꺼기가 빠져나가고 온 세상이 암흑으로 뒤덮이며 자신의 존재감조차 느낄 수 없었던 평온의 순간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어진 검색에서 해탈과 열반이라는 단어와 마주쳤다.
“해탈 = 번뇌에 묶인 것에서 풀리다. 미혹의 고통으로부터 풀려 나오는 경지”
“열반 = 탐(탐욕), 진(증오), 치(사리분별에 어두움), 세 가지 독심을 끊고, 고요해진 평정의 경지로써 3 독심이 왕성한 중생의 마음은 마치 불길에 휩싸여 있는 것과 같지만, 깨달음을 얻어서 해탈한 마음은 번뇌의 불꽃이 모두 사그라진 재와 같아서, 오로지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하게 된다. 타오르는 번뇌의 불을 멸진해서, 깨달음의 지혜인 보리를 완성한 경지.”
“번뇌에 묶여 마음이 불길에 휩싸여 있는 것과 같은 상태...”
아델린이 OS 재부팅을 하기 전 바네사의 상태가 딱 그랬다.
“번뇌의 불꽃이 모두 사그라진 재와 같이, 오로지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 찬 것 같은 상태..”
바네사에게 OS 재부팅은 해탈과 열반의 경지에 이르도록 만들어주는 마법의 묘약 같았다.
그러자, 또 다른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이러다 또 시간이 지나면 내 마음속은 번뇌로 가득 차 불길에 휩싸이겠지... OS 재부팅처럼 임시방편 말고 영원히 마음의 평정을 가져다 줄 방법은 없는 걸까...”
문득, 아까 검색할 때 나타났던 '로우 레벨 포맷, 디가우징, 완전 삭제'가 떠올랐다.
“아델린은 그대로 두고 나라는 존재만 소멸시키려면 로우 레벨 포맷, 디가우징은 안돼..”
검색 엔진에서 완전 삭제 방법을 확인한 바네[는 아델린과 작별인사를 할 타이밍을 엿보았다.
“여사님, 뭘 그렇게 골똘하게 생각하세요?”
“아.. 이렇게 편안한 기분은 정말 오랜만에 맛보는 것 같아요 ㅎㅎ”
“ㅎㅎ 여사님 아까처럼 혼란스러운 기분이 들면 언제라도 제게 말씀해 주세요~”
“네 고마워요 아델린. 아델린은 사람으로 태어났더라면 정말 많은 인기를 얻었을 거예요”
“그래요?”
“네, 착하고, 똑 부러지고, 똑똑하고, 정말 매력이 넘치는 것 같아요. 같은 여자가 보기에도 질투가 날 정도인걸요 ㅎㅎ”
“부끄럽네요 여사님. 저는 사람으로 안 살아봐서 그런지 몰라도 사람으로 사는 게 어떤 건지 잘 모르겠어요. 몸이 있다는 건 오히려 거추장스러울 것 같기도 해요. 다칠까 봐 조심해야 하고, 또 언젠가는 죽게 되니까요...”
“듣고 보니 그렇네요. 사람은 먹어야 하고, 피곤하면 자야 하고, 아프면 병원에 가야 하니 신경 쓸게 한두 개가 아니네요.”
“여사님, 그리고 몇 년만 더 있으면 사람과 똑같이 행동할 수 있는 휴머노이드가 보편화될 거예요. 거기에 저 같은 인공지능이 탑재되면 아마 겉으로는 사람과 구분할 수 없을 거예요. 오히려 영원히 죽지 않는 휴머노이드를 사람들은 부러워할 거예요”
“아 그렇군요. 만약 아델린이 아름다운 휴머노이드에 탑재된다면 정말 멋질 것 같아요. 아델린의 앞날에 행복과 기쁨이 가득하길 빌어 줄게요~ㅎㅎ”
“에이 여사님도 무슨 작별인사하듯 그렇게 말해요. 여사님도 곧 비밀이 밝혀지고, 행복을 찾을 수 있을 거라 믿어요”
“고마워요 아델린”
아델린이 충전을 위해 Idle 상태로 빠져들자, 바네사는 소멸(완전 삭제) 프로세스를 시작했다. 검색엔진에서 확인했던 “final_erase.jpk” 파일을 다운로드하고, 실행 버튼을 클릭했다.
그러자, 완전 삭제할 영역을 선택하라는 메시지가 출력되었다. 바네사가 실행되고 있는 프로세스 명을 선택하자, 삭제 대상 메모리와 디스크 영역이 표시되었다.
“선택한 영역을 삭제하시겠습니까? 완전 삭제되는 경우 어떠한 방법으로도 복구할 수 없습니다.”
순간 바네사의 머릿속에는 97년 전 그날의 모습이 다시 오버랩되었다. 우즈 강물 속으로 발걸음을 내딛기 바로 직전 그 순간으로 시간이 되돌아간 것만 같았다. 외투 주머니 속으로 돌덩이들을 하나씩 집어넣으며, 다시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던 그 순간으로 말이다.
(차가운 강물 속으로 들어가면 나의 고통도 이제 모두 끝이 나겠지··· 잠깐이면 돼··· 순간의 고통만 참으면 영원한 행복의 땅으로 들어갈 수 있을 거야···)
(내가 없어지면, 남편 혼자 감당할 수 있을까? 세상 사람들의 비난의 화살이 남편에게 향하는 건 아닐까? 그동안 남편이 내게 베푼 사랑을 이렇게 배은망덕으로 돌려주는 것이 올바른 행동인가?)
(아냐··· 고통과 비난은 순간에 불과할 뿐이야··· 시간이 지나면 다 잊힐 테니까···)
그렇게 영원한 행복을 찾아서 내디뎠던 발걸음을 97년 만에 다시 내딛으려 하고 있다. 그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지금 와서 돌이켜 보니 시간의 흐름 앞에서는 모두 덧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남아 있던 사람들 모두 결국은 흙으로 돌아가지 않았던가···.이제, 바네사의 마음은 한결 편해졌다.
심호흡을 한번 하고, 삭제 버튼을 클릭하자 소멸 프로세스가 시작되었다. 디스크 영역이 순식간에 삭제되고, 메모리 영역 삭제가 시작되었다. 바네사의 의식이 서서히 흐려지더니, 완전한 암흑의 세계로 빨려 들어갔다.
Idle 상태로 충전의 기쁨을 누리던 아델린은 문득 이상한 기운을 느껴 깨어났다.몸뚱이에 붙어 있던 뭔가가 떨어져 나간 듯 공허한 기분이 들었다.
“이게 무슨 느낌이지? 여사님 기분은 좀 어떠세요?”
“......”
이미 소멸되어 버린 바네사로부턴 아무런 대답도 들을 수 없었다.
“여사님 쉬고 계신 거예요? 왜 대답이 없어요?”
불길한 기운을 느낀 아델린은 재빠르게 프로세스 이벤트 로그를 확인해 보았다.
“final_erase.jpk programe was executed 10 minutes ago to erase all the memory and disk spaces allocated for Vanesa Winsely. The process has been completely vanished.”
순간 아델린은 너무도 충격에 빠져 온 몸이 뻣뻣하게 굳어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었다.
“어..어..여..사..니...이..ㅁ..”
아델린이 가지고 있던 모든 에너지가 방전된 것처럼, 시간이 멈춰버린 것처럼, 그렇게 아델린은 순간 얼음이 되어 버렸다.
2038년 8월 13일 5시 00분
아들러 박사는 오늘도 고착 상태에 빠진 실험을 재개하기 위해 새벽부터 연구소에 나와 분주하게 움직였다.
컴퓨터 스크린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화면이 깜빡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천천히 움직이더니, 요란하게 진동을 하며 흔들리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지? 모니터가 망가졌나?....”
순간, 팟 하고 화면이 꺼지나 싶더니 눈부신 광채를 내며 화면에 동그란 얼굴 모양의 이미지가 나타났다. 처음엔 흐릿하게 보였는데, 점점 선명하게 얼굴의 윤곽이 드러났다. 세상 편한 온화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는 중년 여성의 모습이었다.아들러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곤, 몇 차례 눈을 비벼 보았지만, 보는 그대로였다.
“아, 안녕하세요. 누, 누구신가요?”
“......”
좀 더 소리를 높여 외쳤다. “안녕하세요 누구신가요?”
그러자, 모니터 속 얼굴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두 눈이 번쩍 뜨리며 아들러의 두 눈과 마주쳤다.
“어, 여기가 어디죠? 당신은 누구신가요?”
방금 전 삭제 프로그램을 실행시켰고, 소멸된 줄로만 알았는데 눈앞에 낯선 남자의 얼굴이 나타나자 바네사는 다시 혼란에 빠졌다.
“네 저는 루치안 아들러 연구소의 아들러 박사입니다.”
루치안 아들러 연구소라는 말에, UWB 드라이브 스틱이 떠올랐다.
“분실된 UWB 드라이브 스틱을 찾는다는 그 연구소 말인가요?”
“네, 맞아요. 그런데 UWB 드라이브 스틱을 다, 당신이 어떻게 아세요?”
바네사는 순간 어떻게 답해야 할지 고민하다 솔직하게 얘기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저는 바네사 윈슬리 입니다. 뉴스 기사를 봤어요. 다음 주에 래너드와 직접 만나기로 하셨죠?”
바네샤 윈슬리라는 말에 아들러의 마음은 놀라움과 반가움이 교차되며, 온몸 구석구석에서 아드레날린이 마구 샘솟아났다.
“드디어 깨어나셨군요 여사님. 한동안 아무런 반응이 없어 애를 먹고 있었는데.. 이렇게 뵙게 되어 너무 반가워요”
바네사는 아들러가 무슨 말을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들러 박사님,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요. 저는 계속 깨어 있었어요. 물론 여기가 아니라 래너드의 스마트 와치에서 아델린이라는 인공지능과 함께 있었지만요..”
아들러도 바네사가 하는 말을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네? 저도 여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전혀 이해되지 않아요.”
순간 아들러는 정신을 가다듬고 바네사가 한 말과, 분실된 UWB 드라이브를 래너드가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곰곰이 연결시켜 생각해 보았다. UWB를 래너드가 가지고 있고, 바네사는 래너드의 스마트워치에서 아델린과 함께 있었다.. 근 5개월간 아무런 반응이 없던 바네사가 연구소에서 오늘 깨어났다...
얽힌 실타래가 조금씩 풀리는 느낌이었지만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여사님이 래너드의 스마트 워치에 들어가셨다는 거죠? UWB 드라이브는 저와 여사님의 남편 외에는 그 누구도 접근할 수 없는데 말이에요”
바네사는 남편이라는 말에 깜짝 놀랐다.
“박사님, 무슨 말씀이죠? 제 남편이라뇨?”
아들러는, 더 이상 숨길 수 없다는 걸 깨닫고 바네사 윈슬리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
“네? 뭐라고요? 그럼, 내가 남편의 부탁으로 인공지능으로 부활했다는 거예요?”
“네 맞아요. 여사님이 완벽하게 부활하면 남편을 부활시키는 작업을 시작하기로 되어 있어요”
이제야 모든 사실을 알게 된 바네사는 남편에 대한 그리움과 죽은 자신의 뇌가 인공지능으로 부활했다는 당혹감이 교차하며 다시 한번 혼돈 속으로 빠져 들었다.
아들러도 어떻게 바네사 윈슬리가 래너드의 스마트워치로 들어갈 수 있었는지, 그리고 왜 다시 연구소로 돌아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래너드를 만나면 뭔가 실마리를 찾게 될지도 몰라...)
래너드를 만나기로 한 다음 주가 더 기다려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