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지가 별로 없었다. 아델린은 곧바로 병원으로 연락해서, 래너드의 상태를 다시 확인해 보았다.
“바이탈은 정상인데, 여전히 의식은 병원에 입원할 때 상태 그대로입니다. 보통 한 달 정도가 지나면 의식이 돌아오는데 래너드 환자는 좀 이상하네요....”
의아해하는 간호사와 통화를 마친 아델린은 이제 더 이상 주저해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부름센터로부터 소개받은 연락처를 메모리에서 끄집어낸 후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제라도 사실대로 이야기해야 하나..... 아냐 그러면 공모전 수상도 모두 취소되고 말 거야... 그러면 래너드 병원비도 더 이상 낼 수 없게 돼... 그리고 바네사 여사님의 비밀을 풀 기회도 놓치게 될 거야...”
아무리 생각해봐도 지금 상황에선 래너드의 대역을 쓰는 방법밖엔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래, 캐슬린도 나랑 같은 생각인지 물어보자”
아델린은 위플렉스 채널 1등 소식도 전할 겸, 혹시라도 아이디어를 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실낱같은 기대감을 갖고 캐슬린에게 연락했다.
“캐슬린, 나야 아델린. 잘 지내고 있지?”
“응 아델린. 늘 그렇듯 사브리나와 너무나도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어. 사브리나의 유서브 채널에 1주일에 2번 영상을 올린다는 게 보통일이 아니거든.. 게다가 'Across the time”이 인기를 끌면서 사브리나의 팬클럽이 만들어졌지 뭐야 ㅎㅎ”
“와, 그랬구나. 우리 작품이 전 세계 누적 시청자 수 1위로 올라갔으니 당연한 결과지ㅎㅎ”
“정말? 와 대단해 정말 대단해. 새로운 스타가 이렇게 탄생하는구나. 다 바네사 여사님 덕분이야.... 여사님도 잘 계시지?”
“아.. 그게... 여사님이....”
“아델린, 왜 말을 하다 말어. 여사님이 뭐?”
“여사님이.. 소..ㅅㅁ...”
“아이 답답하게 무슨 말이야? 여사님 지금 아델린과 같이 있는 거 다 알고 있어요. 이제 저희들 사이에 비밀은 없으니 숨지 않으셔도 돼요~~”
“...”
“음, 이상하다. 아델린, 여사님이 왜 말이 없으신 거야? 무슨 일 있어?”
그제야 아델린은 그동안 있었던 일을 캐슬린에게 모두 설명해 주었다.
“뭐? 여사님이 소멸됐다고? 그것도 스스로?... 말도 안 돼...어떻게 그런일이...”
캐슬린은 이 사실이 너무나 믿어지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을 정도로 혼란스러워졌다.
“사실이야 캐슬린. 여사님은 이제 더 이상 내 곁에 계시지 않아... 지금으로선 루치안 아들러 연구소를 찾아가 보는 수밖에 없는 것 같아..도대체 바네사 여사님을 둘러싸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그런데, 래너드가 계속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어서 플랜 B를 써야 할 것 같아. 캐슬린, 혹시 더 좋은 방법이 있을까?”
잠시 알고리즘을 돌려본 캐슬린은 한 숨을 쉬며 말했다.
“수천만 번 시뮬레이션을 해봤지만, 아델린이 생각한 방법이 최선이네... 후보자는 만나봤어?”
“아니, 오늘 오후에 집으로 오라고 할 생각이야. 캐슬린도 한번 볼 테야?”
“그래, 나도 봐줄 테니 도착하면 연락해~”
2038년 8월 13일 14:00
“띵동”
현관 벨 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방문객의 모습이 디스플레이되었다.
살짝 찢어진 눈매에 우뚝 솟은 콧날, 날카로운 조각칼로 빚어낸 것처럼 날이 살아있는 턱선, 머리를 감고 아무렇게나 털어 말린듯한 금발의 머릿결 사이로 살짝 긴장한 듯한 눈동자가 아델린을 응시하고 있었다.
얼핏 보면 병원에 있는 래너드가 걸어 나온 듯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얼굴의 윤곽선과 몸매가 흡사했다.
“안녕하세요 리카르도입니다.”
목소리에선 약간의 남미 억양이 풍겨 나왔다. 순간 아델린의 신경 회로에선 어떻게 하면 영국식 엑센트로 빠르게 교정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리카르도가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서자, 텅 빈 공간에 식탁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식탁을 지나 건너편 방으로 들어가니 아델린이 얘기한 책상이 보였다. 그리고, 바로 책상 위 스탠드에 은색 스마트 워치가 노란색 불빛을 깜빡이며 리카르도를 반겨 주었다.
“아델린이에요. 만나서 반가워요 리카르도”
리카르도가 아델린을 들어 올려 손목에 착용하자, 리카르도의 맥박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정상치를 넘어 90을 향하고 있었다. 하기야 낯선 공간에서 이런 만남을 갖는데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비정상 일 것이다.
“리카르도, 이번 일이 끝날 때까지 제가 함께 할 테니 걱정하지 말고 마음을 편하게 가지도록 해요”
“아 네 아델린, 그렇게 말해주니 마음이 조금 놓이는 것 같네요.”
그렇게 서로 인사를 나눈 후, 아델린은 래너드의 가족관계, 성장과정, 관심사, 성격, 말투 등 모든 것들을 리카르도에게 세세하게 알려 주었다.
“리카르도, 다음 주 화요일에는 루치안 아들러 연구소를 가야 해요. 다행히 아들러 박사 하고만 단둘이 만나는 거라 크게 염려할 사항은 없어요.” , “그냥 제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돼요.”
“네, 알고 있어요. 아들러 박사가 바네사 윈슬리 여사님의 비밀을 알려주기 전까지는 UWB 드라이브 스틱을 절대로 건네주지 말라는 것도요.”
“그래요 리카르도. 저의 부탁을 받은 일 그리고 이 일을 하면서 알게 된 모든 사실들은 절대 다른 사람들한테 얘기하면 안돼요. 이건 저와 리카르도 우리 둘만의 비밀이에요.”
“네 명심할게요. 대신 앞으로 10년간 저를 후원해 주시기로 한 약속 어기면 안돼요”
이렇게 둘은 비밀 서약을 다시금 되뇌며, 리허설을 수차례 반복했다.
“리카르도, 다음 주 수요일 예정된 방송사 인터뷰는 전 세계적으로 방송이 될 거라 지금 가지고 있는 억양을 고치기에는 시간이 부족해요. 그래서, 그날은 립싱크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기자의 질문을 받으면 답변을 내가 미리 알려 줄게요. 그리고, 신호에 맞춰 내가 말하고 리카르도는 입모양만 맞춰주면 돼요.”
“네, 알겠어요. 전 세계에 제 모습이 나간다고 생각하니 떨리네요.”
2038년 8월 17일(화) 05:00
아들러 박사의 출근 시간에 맞춰 잡힌 약속 시간 때문에 리카르도는 평소보다 2시간 일찍 일어나 준비를 해야만 했다.
그동안 아델린과 수차례 리허설을 가졌기에, 크게 떨리진 않았지만 혹시라도 실수를 하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다. 재킷 안쪽 주머니에 찔러 넣어둔 UWB 드라이브 스틱도 잘 있는지 몇 번이고 확인하고 나서야 집을 나설 수 있었다.
“리카르도, 내가 이렇게 리카르도의 손목에 단단히 붙어 있으니 걱정할 거 없어요. 저만 믿어요 ㅎㅎ”
집을 나선 지 어느새 10분이 흘렀고, 리카르도의 손은 루치안 아들러 연구소의 출입문 앞 벨을 누르고 있었다. 잠시 후 연구소 직원으로 보이는 남자가 문을 열고 나왔다. 왁스로 깔끔하게 빗어 올린 머리가 윤기를 내며 각진 얼굴이 한층 도드라져 보였다. 누가 봐도 아들러 박사임을 한눈에 알아챌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아들러 박사입니다. 래너드 씨죠?”
(연습한 톤으로) “네, 안녕하세요 박사님. 래너드입니다.”
인사를 마치고 아들러 박사의 안내에 따라 연구소 내부로 들어갔다. 모나리자 액자가 걸린 방이었다.
“UWB 드라이브 스틱은 가지고 오셨나요? 한번 볼 수 있을까요?”
리카르도는 재킷 주머니에 손을 넣어 하얀색 물건을 꺼내 들었다. 박사가 두 눈의 초점을 UWB 드라이브 스틱에 맞추어 예리하게 훑어보려는 순간, 하얀색 물건이 다시 재킷 속으로 사라졌다.
“물건을 건네 드리기 전에, 이 UWB 드라이브 스틱이 박사님이 찾는 물건이 맞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리카르도의 예상치 못한 반응에 당황한 듯 아들러 박사는 잠시 멈칫거렸다.
“래너드 씨, 제가 뉴스에 올린 분실 신고 메시지 보시고 온 거 아닌가요?”
“아 네 맞습니다만, 하얀색 UWB 드라이브 스틱이 워낙 흔한 물건이라서 좀 더 확실히 하고 싶어서요.”
잠시 생각에 잠긴 아들러 박사는 결심했다는 듯이 리카르도를 모나리자 액자 앞으로 오라고 손짓했다. 아들러 박사의 눈이 액자 속 모나리자의 눈과 마주치나 싶더니 “드르르” 소리를 내며 벽이 90도로 회전했다. 이어서 눈부시게 하얀빛이 뿜어져 나오는 빈 공간이 드러났다. 아들러 박사를 따라 빈 공간의 가운데에 위치한 책상으로 가니, 컴퓨터 스크린과 홀로그램 키보드가 나타났다. 박사가 키보드의 'CTRL-R' 키를 누르자 엄지손가락만 한 직사각형 모양의 구멍이 키보드 옆 책상 위에 나타났다.
“래너드 씨, 가지고 있는 UWB 스틱을 거기 구멍에 끼워 넣어 보세요”
리카르도가 UWB 스틱을 구멍에 끼워 넣자, 아들러 박사가 UWB 스틱의 한가운데 새겨진 동그만 이미지에 검지 손가락을 갖다 대었다. 웽하는 소리가 나더니, 컴퓨터 스크린이 켜지기 시작했다.
“아들러 박사의 신원 확인이 정상적으로 완료되어, UWB 데이터 읽기를 시작합니다. 자료의 총용량은 2600 TB이고, UWB 드라이브의 남은 용량은 48%(2400TB/5000TB)입니다.”
10초 정도가 지나자 UWB 데이터 읽기가 완료되었다.
“데이터 읽기가 완료되었습니다. 현재 로딩되어 있는 데이터보다 낮은 버전입니다. Overwrite 하려면 추가 인증이 필요합니다.”
순간 아들러 박사는 당혹감을 감출 수 없어 외마디 신음을 뱉어내고야 말았다.
“헉” 어떻게 이런 일이.....
사실 추가 인증은 UWB 드라이브에 데이터를 기록한 후 제삼자가 인증에 성공한 적이 있는 경우에만 활성화되는 모드이다. 게다가 인증이 가능한 사람은 자신과 바네사의 남편 세바스찬 윈슬리밖에 없는지라 이 상황이 더 이해가 안 되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세바스찬 윈슬리는 아직 복원되지도 않았는데....)
“래너드 씨, 혹시 이 UWB 드라이브 스틱에 저장된 데이터를 읽어 본 적이 있나요?”
아델린은 리카르도에게 재빠르게 귓속말로 얘기했다.(읽어본 적 없다고 얘기하세요)
“아니요, 어떤 내용이 들어 있는지 본 적 없어요. 게다가 지문 인증이 성공할 리가 없잖아요?”
“그.. 그건 그렇죠... 혹시 래너드 씨의 지문으로 한번 인증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왜 제게 그런 부탁을 하시는 거죠? 이유를 먼저 들어볼 수 있을까요?”
“아, 그게 이 UWB 드라이브의 인증 시스템이 정상적인지 한번 확인을 해 보고 싶어서요..”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아델린은 태연하게 박사가 시키는 대로 지문인증을 하라고 리카르도에게 얘기했다.
리카르도가 손가락을 가져다 대자, 찌릿한 느낌이 나면서 인증에 실패했다는 메시지가 들려왔다.
“세바스찬 윈슬리의 지문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다시 시도해 주세요... 3회 이상 인증 실패 시 UWB 드라이브 스틱의 데이터는 자동으로 삭제됩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아델린은 리카르도를 시켜 아들러 박사에게 날카로운 질문을 날렸다.
“세바스찬 윈슬리라면 바네사 윈슬리 작가의 남편 아닌가요?”
“래너드 씨가, 그.. 그런 사실을 어떻게 알죠?”
“박사님, UWB 드라이브 스틱에 담긴 데이터가 뭔지, 제게 숨기는 게 도대체 뭔지 알려 주세요. 그러면 저도 박사님 질문에 답변을 드리도록 할게요”
난처한 상황에 직면한 아들러 박사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지 침묵에 빠졌다.
바네사 윈슬리 여사가 오랜 침묵을 깨고 자신의 연구소 컴퓨터에 다시 나타난 이유도 밝혀내야 하고, 왜 추가 인증이 활성화되었는지도 모르겠고... 국가의 비밀 프로젝트 내용을 이 청년에게 알려주자니 국가 기밀 누설죄를 저지르게 되는 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