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장난
같이 잠이 든 날이었다. 자취방에서 잠에 들었는데 나는 잠결에 그만, 생수병을 쳐서 쓰러뜨렸다. 비몽사몽 몸을 일으켜 쏟아진 물을 치우려했다. 그때 지호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놀랍게도, 그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듣고 벌떡 일어나 대신 물을 닦고 주변을 정리하는 거였다. 그 얼굴엔 짜증이 한 톨도 서려 있지 않았다. 본능적인, 반사적인 행동에 가까웠다. 누가 로봇에 명령어를 입력한 것처럼. 그는 내가 덜렁대고 실수해도 짜증 내는 법이 없었다.
그때는 내 단점들이 물병 속 물처럼 콸콸 쏟아지는 것 같았다. 많은 단점과 치부들이 같이 넘어져서 바닥을 적시는 것 같았고 미래의 우리를 귀찮고 힘들게 할 것 같았고 지호는 묵묵히 그걸 치우고 수습해 줄 것 같다는 예감. 난 앞으로 얼마나 더 덜렁대고 쏟게 될까. 생수 한 병으로 안 끝날 것이다. 그러고 후회하고 또 못 고치겠지.
보통 장점은 당연히 여기게 되고, 단점까지 좋아해 주는 건 정말 어렵다. 순백의 땅에 진흙이 더 눈에 띄듯이 거슬린다. 특히 나는 예민한 편이라 애인들의 단점을 줄줄이 찾아내고 불평하다가 헤어지는 편이었다. 이 단점을 갖고 있다면 우린 함께 할 수 없어. 하는 식으로. 맞춤법을 틀리는 것으로도, 사소한 먹는 습관만으로 쉽게 정이 떨어지곤 했다. 그런 내게도 지호의 단점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모든 면에서 멋진 사람이었고, 그래서 이젠 나 자신이 부족해 보이기 시작했다. 그전까지 콧대 높은 나였건만 주제 파악을 하게 된 거다. 연인 간 상대 평가를 하고 있던 내게 강적이 나타난 거다.
어릴 때 상상을 하곤 했다. 어른 돼서도 가끔은 했다. 시간을 정지해 놓고 나만이 스페어로 시간 선물을 받는 거다. 시간 선물을 나만 받을 수 있다면 나는 부족한 점을 보완하고 앞서갈 수 있겠지, 다른 앞서가는 사람들을 좀이라도 따라갈 수 있겠지. 이번 연애에선 잠깐 헤어지고 다시 돌아오는 건 어떨까까지 생각했다. 잠시 일시 정지를 눌러놓고, 시간을 멈춰놓고 얻은 혼자만의 시간 동안 자기 계발을 미친 듯이 해서 스펙과 지혜, 인성을 끌어올리는 생각.
그만큼, 나는 어떤 면에서는 자신감이 높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자존감이 낮았다. 내 단점들을 최대한 숨기고 싶었다. 그걸 언급하면 진짜로 단점이 돼버리고 이미지가 굳어질 것 같아서. 하지만 천성은 숨겨지지 않았고, 사실은 지호도 내 단점을 다 알았다. 가정 환경에서 받은 상처, 미성숙한 면들, 위생 관념, 건강 문제, 그리 세련되지 못한 지혜와 센스 등. 모든 걸 그저 포용할 뿐, 전혀 날 고치려 들지 않았다. 나는 내 생수통에 든 단점들이 아주 크고 많다고 생각한다. 내가 주워 담아야 할 물 용량도 많을 것이다. 그것들을 같이 치워주는 사람이 있다면 실수 가능성이 커도 보완이 될 수 있겠지. 물바다가 돼버리진 않겠지.
내 ‘단점 자아’들은 온전히 품어주는 사람이 나타나자 자유롭게 날뛰다가 진정하기 시작했다. 안전하다는 느낌을 가지기 시작했다. 아직은 갈 길이 멀지만. 단점을 품어준다는 건 자다가도 일어나서 상대의 잘못을 치워주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