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장난
3의 공식이란 건 보편적으로 적용된다. 소개팅 때도 3의 공식이 있는데, 보통 세 번 만나고 고백할지 그만 만날지 판단하는 것이다. 삼세판에 쓰리고 하는 것처럼. ‘삼프터’ (애프터 3번째)라는 용어도 있듯이, 그때쯤 사귀는 게 일종의 공식인 모양이다. 누가 만든지는 모른다. 세 번은 만나봐야 판단의 최소 기준이 된다고 여겨지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나는 처음 만나면 나와 결이 맞을지 아닐 지 빨리 판단하는 편이지만, 대세엔 이유가 있겠지 생각하며 세 번 만날 때까지 기다렸다. 2주 정도 걸리는 시간. 참을성 없던 나는 삼프터가 되기 전부터 지호에게 물었다.
“첫 번째 보고 두 번째 보니까 어때?”
“그건 세 번째 만남 때 얘기해줄게. 난 길게 보는 타입이라.”
그놈의 3의 법칙. 모든 신화와 이야기에서 주인공은 한 번에 원하는 걸 얻을 수 없다. 적어도 세 번의 시련과 관문을 통과해서 얻는다. 헤라클레스 같은 영웅은 12번이고 다른 영웅들은 보통 3번인 경우가 많다. 신과 운명의 시험을 거쳐, 그 끝엔 보물의 단물을 맛볼 것이다.
첫 번째 관문은 내가 만든 조건으로, 가장 어려웠다. 애초에 우린 3:3 미팅으로 만나기로 했다. 단톡방은 이미 만들어져서 서로의 프로필사진을 염탐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만나기도 전에 코로나 때문에 흐지부지 파투가 났다. 남자 셋 다 괜찮아 보였기 때문에 좀 아쉬웠다. 그래서 그쪽에 의사를 전달했다. 내가 원하는 조건들에 맞는 사람과 따로 만나고 싶다고. 그중 한 명인 지호가 조건에 다 맞다고 해서 따로 보기로 했다. 그 조건이 뭐냐고? 키 크고, 재밌고, 착하고, 종교와 정치관이 나와 맞을 것. 외모와 학벌, 직업은 준수한 것이 검증됐으니 뺐다.
내가 이렇게 조건을 따지는데도 그가 거부감을 안 가졌던 건 물질, 계급적 조건(돈, 학벌 등)이 아닌 정신적 조건을 따졌기 때문일 것이다. 물질과 계급을 보는 게 나쁘다는 건 아니고, 단지 정신적 조건을 따지는 둘의 성향 자체가 맞았다는 얘기다. 종교와 정치관을 보는 건 특이해 보일 수 있지만, 이 두 개가 안 맞으면 대화가 깊이 안 통할 것이다.
예전에도 나는 같은 조건을 내밀며 주변에 소개팅 부탁을 했었지만 타박만 받았다. “너도 완벽하지 않은데 왜 완벽한 사람을 원하냐.” “그런 사람이 어딨냐. 눈을 낮춰라.” 등등. 정말 그런 사람은 없나보다… 포기하기 직전에 ‘그런’ 사람을 만났다. 역시 뭐든 해탈하고 있어야 온다. 결과적으론 눈을 안 낮추고 원하는 조건을 유지한 게 다행이었다. 가리지 않고 받기보다, 적극적으로 원하는 사항을 어필하고 성공한 것에 성취감도 들었다.
두 번째 관문은 코로나였다. 코로나 시국이 기승을 부리면서 소개팅 자체도 시들해져 갔다. 만나기 직전까지도 만날까 말까를 고민했다. 만나고 나서 감염이라도 되면 회사에 얼마나 욕을 먹을까…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당일까지도 취소를 고민했다. 하지만 미팅도 취소되고 어렵게 잡힌 일정이니, 일단은 코로나를 뚫고 만났다.
8월 말, 가을로 가는 길목에 서울의 한 양꼬치 집에서 소개팅을 했다. 양꼬치와 맥주 한 잔을 곁들였고, 나와서는 근처 카페들이 문을 닫은 탓에 지하철 한 정거장만큼 걸었다. 아직 더운 기가 남아있는 공기를 뚫고 대화가 바쁘게 오갔다. 좋아하는 영화 얘기를 했다. 너무 말이 잘 통해서 나는 첫 만남에 말했다.
“우리 이 정도면 결혼해야 되는 거 아니에요?”
세 번째 관문은 그의 '반지 테스트'였다. 사실 테스트는 아니고 농담으로 한 말이지만, 사실상 그의 마음을 굳혀준 계기가 되었다. 한번은 그가 올림픽공원에서 난데없이 반지를 내밀었다. 그냥 반지가 아니라, ‘절대 반지’. 그가 뉴질랜드 <반지의 제왕> 촬영장에서 사 온 레플리카다. 나는 그걸 보고 뛸 듯이 기뻐서 난리를 쳤다. 우리 둘의 인생 영화가 <반지의 제왕>이었다. 그러니 자신의 보물을 보고 그렇게 격한 리액션을 보여준 내게 이 여자라며 운명을 느낀 것도 당연한 일이다.
이런 관문들을 거치며 성큼성큼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는 급한 마음을 숨기면서 그가 자기 생각을 공식 발표하기까지 기다렸다. 드디어 삼프터의 날, 밤의 한강에서 우리는 만나보기로 하며 원하던 걸 이뤘다. 나중에 그는 고백 비하인드를 들려주었다. “신중하게 다가가느라 많이 자제했어. 소중하니까 가볍게 다가가지 않으려고.”
우린 이제 로맨스 신화에서 사랑을 쟁취한 주인공이 되는 걸까? 앞으로 또 세 번 또는 여러 번의 시련이 온다면 어떤 게 올까? 결혼이라는 엔딩으로 갈 수 있을까? 엔딩을 보고 나면 어떤 사람으로 성장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