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운 위로
우리는 기억이란 주제에 대해 특별히 탐닉하는 편이다. 둘의 기억력이 안 좋고 자꾸 까먹는 것도 있고. (30대 초반/20대 후반에 벌써..) 기억이 소중해서 하나하나 저장하고 싶기도 하다.
서로의 기억력을 놀리는 장난도 많이 친다.
"우리 저번 주에 뭐했게?" 10초 안에 대답을 못하면 그때부터 무서운 깐죽거림이 시작된다.
"알어." 하면서 구체적인 답을 피한다면 100% 기억이 안 나는 거다. 상대가 서운할까 봐 기억나는 척 예의를 차리지도 않는다. 저번 주면 다행이지, "어제, 그저께 뭐 먹었지?" 도 기억이 안 나고, 나눈 대화는 더더욱 기억 안 난다.
그걸 기록해둘걸, 찍어둘걸, 기억력 좋게 태어날걸.. 어쨌든 인간들은 기억을 잃고는 후회한다.
나는 사진이나 일기로 저장하는 방식을 택했고, 남친은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사는 법을 택했다. 세상엔 이런 두 부류의 사람이 있는 것이다.
기억은 시간, 순간을 붙잡아두는 뇌 활동이다. 평범한 일상은 금방 잊히고, 특별히 빛났거나 좌절스러웠던 순간은 절대 잊혀지지 않는다. 어쩔 때는, (자주) 내 의지와 상관없이 무의식적으로 떠오르는 기억들이 랜덤이라는 것이 삶의 신비한 점이다. 행복한 연애의 기억들은 보통 기억하고 간직하고 싶다.
<메멘토>, <이터널 선샤인>, <첫 키스만 50번째>는 나의 기억 3부작이다.
<메멘토>는 기억해내려는 이야기, <이터널선샤인>은 기억을 지우려는 이야기, <첫 키스만 50번째>는 기억 안나는 상대를 인정하고 사랑해주는 이야기다. '기억'으로 할 수 있는 얘기는 이렇게나 다양하다.
<메멘토>에서 단기 기억 상실증에 걸린 주인공에겐 반전이 있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복수하는 대상이 누구인지를 자꾸 잊어서 중요한 키 정보를 자기 몸에 문신으로 새겨서 기록한다. (벗어야만 볼 수 있는 정보들) 남친은 이 영화를 10번이나 봤는데, 사건의 순서들이 뒤죽박죽 전개되어 끼워 맞추는 재미가 있기 때문에 볼 때마다 다르다고 한다. 기억력이 심각하게 없어지면 나도 몸에 새기고 싶어 질까? 망각은 축복이라는데, 나는 욕심이 많은지 사소한 것을 잃기가 왜 이렇게 싫을까. 하나하나 기억 클라우드 공간에 저장하고 싶다.
"우리 모두가 그런 짓을 해!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소한 것들 따위 잊어버린다고!" - 테디
<이터널선샤인>은 전 애인을 잊으려 특정 기억을 없애주는 회사에 의뢰해 기억을 지운다. 그런데 상대도 같은 짓을 했고. 둘은 서로에 대한 기억이 없다. 그런데도 또다시 사랑에 빠진다. 어떤 사랑은 운명이라고 밖에 설명이 안된다.
영화에서 연인과의 기억을 찾아내 지우려고 할 때마다 그 기억들이 살아남으려고 도망 다니는 설정도 재미있다.
"이런 추억이 곧 사라지게 돼. 어떡하지?" - 클레멘타인
"그냥 음미하자" - 조엘
기억 하나하나에는 자아가 있는 것 같다. '첫 키스한 날', '같이 공연에 간 날' 같이 기억에 라벨을 소중히 붙여본다. 뇌가 녹슬어서 기억을 지우려고 할 때마다 잘 살아남길. 사라지더라도 그 촉감과 느낌은 내내 생생하길.
<첫 키스만 50번째>는 어제의 기억이 리셋되는 알츠하이머에 걸린 여자 이야기. 남자는 사랑하는 여자가 자신을 못 알아보는 이 관계를 힘들어하지만, 그만의 방식을 만든다. 매일 아침 자신에 대한 소개 영상을 틀어주고, 매일 첫 키스를 나누고 아이도 낳는다. 기억력이 안 좋은 사람에겐 웃기면서 슬프고 사랑스러운 영화다. 기억의 재앙 앞에서도 흔들림 없는 사랑이라니. 판타지라도 믿고 싶은 예쁜 이야기다.
"이제 마지막 첫 키스를 해도 될까요?" - 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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