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운 위로
<실버라이닝플레이북>은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었다는 막장 힐링 (?) 로맨스 코미디.
'실버라이닝'은 구름 낀 하늘에 한줄기 빛(희망)으로 비유되는 영어 숙어다. 영화는 내면의 화를 감춰놓고 때론 폭발하곤 하는 남녀의 모습을 잔잔하게 그리는 게 특징이다. 그들은 우연히 자주 만나게 되고, 동네에서 런닝할 때 만나서 티격태격하고, 서로의 목적을 위해 댄스 경연대회를 같이 준비하게 된다. (헤어진 아내를 되찾는 걸 도와주는 핑계로) 스토리라인은 뻔하지만, 과정은 힘이 있다. 둘의 속은 곪아 있어서 마치 폭탄 같다. 이혼까지 하게 된 분노조절 장애 남자와 남편을 잃은 후 회사 직원들과 관계를 맺은 똘끼충만 여자가 싸우면서 서로의 상처를 치유해간다. 아이러니하게도. 상처를 내면서 상처를 치유하다니.
둘은 모두 전 사람을 잃었다는 괴로움이 있다. 그걸 어찌할 줄 몰라 방어벽을 치고 한껏 가시를 세우고, 새로운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다. 마인드 컨트롤을 해봐도 마음은 마음대로 안된다. 그들은 컨트롤을 포기해버린다. 미친 사람들처럼 욕하고 소리 지르고 싸우고. 그러다 경찰까지 오해해서 출동하는 상황도 발생한다. 누가 보아도 건강한 방법은 아니다. 그런데 그래야만 곪은 속이 풀리는 사람들도 있는 것이다. 갈 때까지 극한으로 치닫고 나서야 머리가 맑아지고 마음이 평온해지고 서로를 알아보게 되는 사람들. 서로를 할퀴지만 전보다 재생속도가 빨라지며 시너지가 나는 사람들. 이런 사랑도 있다. 속이 풀리고 나면 누구보다 따뜻한 사랑을 할 수 있겠다는 희망의 빛이 보인다.
내 광기를 볼 수 있는 방법은 당신이 미친 짓을 할 때뿐이에요
<연애의 온도>는 3년의 비밀 사내연애를 끝냈지만, 헤어진 후 더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전 연인 이야기다. 이 쪽 커플도 만만치 않게 소리 지르고 화내는 모습을 많이 보여준다. 온갖 찌질한 짓까지 해버리며 극단으로 간다. 새 애인이 생기면 SNS를 염탐하고, 쪼잔하게 받은 선물을 부순 후, 택배를 부친다. 커플 요금을 해지하기 전에 인터넷 쇼핑 폭탄을 던져놓고 해지한다. 현실은 더할 수도 있지만.. 이게 비밀연애, 죽고 못살던 연애의 끝이야 라고 내장까지 보여준다.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자꾸 서로에게 '헤어지자는 말을 하라'며 등을 미는 두 사람. 하지만 아무리 등을 밀어도 등은 붙어 있다. 잘해보려고 하면 엇나가고, 못되게 굴면 다시 붙는다. 미묘하고 휘몰아치는 감정을 속 시원하게 현실적으로 보여주는 영화의 엔딩이 인상적이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놀이공원에서, 망가진 채로 엉엉 우는 그들. 망가진 놀이기구들 같다. 헤어지자는 말을 안 한 채, 자연스럽게 '진짜' 이별을 맞는다.
살얼음판 걷는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불안함 같은 거.
어떤 싸우지 말아야 한다는 강박관념 같은 거.
- 영
나도 전의 연애에서 이런 적이 있었다. 우리 둘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갈 데까지 갔다. 특히 내가 더 화를 많이 냈다. 욕까지는 안 했던 것 같은데, 조곤조곤 작게 씨부리는 것부터 크게 소리 지르는 것까지 감정의 0부터 10까지 경험했다. 평소엔 순하다는 소리를 듣는 나인데, 그런 폭풍 같은 감정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별로 없었다. 더 이상 겪고 싶지 않을 만큼 진저리가 나는 경험이었지만 쉽게 서로를 놓지 않았다.
폭발하는 감정이 폭발하는 사랑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런 큰 감정을 경험하고 나서, 작은 감정이 잔잔하게 가는 연애를 해낼 수 있을까? 의문도 들었다. 이렇게 크게 좋고 크게 싸우는 연애의 자극은 활동적인 감정을 주기도 했다. 감정을 분출하는 과정에서 스트레스 해소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화를 내고 나면 어느 정도 자괴감에 시달렸고, 체력이 소진됐다. 점점 피폐해지는 나를 보며 건강한 연애가 아니란 걸 깨달았다. 자연스럽게 나는 '헤어지자'라고 말할 수 있게 됐다. 나는 <실버라이닝플레이북>처럼, 상처 내면서 상처를 치유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나의 '실버라이닝'은 큰 감정 기복 있는 연애에만 보이는 게 아니었고, '연애의 온도'가 그렇게 뜨거울 필요도 없었다. 나만의 온도를 찾아가는 게 연애를 많이 해본 사람의 강점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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