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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슬 Jun 10. 2021

더우면 벗으면 되지


  몇몇 친구들로부터 묘하게 따돌림을 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며칠 전엔 마음대로 잠수를 탄 사람도 있었다. 대차게 약속을 어긴 것은 그인데 내 쪽에서 먼저 연락을 한 뒤에야 알아차린 눈치였다. 모두 꼴 보기 싫다. 밉다. 엉덩이를 빨갛게 되도록 때려서 울게 만들고 싶다. 정색을 하고 다그칠 걸 그랬나, 엄한 태도로 고개를 숙이게 했어야 했나. 분한 마음에서 고약한 냄새가 폴폴 나고 후후 불어봐도 흩어지질 않는다. 이내 이런 내 모습이 볼품없어 자존심이 상한다. 안 그래도 상처 입은 마음에 못된 말들이나 구겨 넣고 있다니... 아픈 데 소금이나 뿌리고...! 이런 것쯤 지나가는 바람인 양 거들떠도 보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어쩌지, 지금 당장 마음속으로 용서라도 해야 하나? 아니 뭘 용서해, 사과한 사람이 없는데! 스스로를 달래려 해본 섣부른 시도에 마음만 더 끓는다.


  용암이라도 흐르는 듯 부글대는 마음에 찬물을 촥 끼얹었다. 더우면 벗으면 되고, 피곤하면 자면 되고, 추우면 입으면 되는 것처럼 볼품없는 게 싫으면 볼품없지 않으면 되는 거 아니냐! 뭘 할 것도 없이, 뭘 더 할 것 없이, 그냥 안 하고 싶은 걸 하지 말자. 용서도 하기 싫으니까 하지 말고, 볼품없는 게 제일 싫으니까 그것부터 안 하기로. 응. 자리에서 일어나 세수를 한 번 하고 물 묻은 손을 탈탈 털고서, 오늘 해야 할 일 리스트를 하나씩 지워나간다. 볼품없을 시간이 없다. 흥, 나도 내 할 일이 있다 이거야. 백수여도 24시간이 모자란다고. 1. 발톱 깎기 2... 

  책 읽은 보람이라는 게 이런 것인가. "볼품없기 싫으면 볼품없기를 그만둬." 그 누구에게도 조언이랍시고 할 수 없는 이 이상한 말이 스스로에게 먹히다니. 이건 며칠 전 요시타케 신스케라는 양반에게서 배워 응용한 것인데 지금 이 상황에 아주 적절하게 들어맞았다. 놀랍게도 금세 마음이 가벼워졌다. 후~ 그래, 다들 맘대로 하라 그래~ 그러라 그래라~


  요시타케 신스케 작가 책의 입문은 <게다가 뚜껑이 없어> 로 했다. '뚜껑이 없네' '에이씨 뚜껑이 없네' '에라이씨 뚜껑이 없잖아'가 아닌 '게다가 뚜껑이 없어'. 묘하게 차분한데 열 받는 제목. 그러나 이 제목을 쓴 사람은 게다가 뚜껑까지 없는 상황에 뚜껑이 열리지 않은 듯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생을 달관한 느낌이랄까. 그때도 이 요상한 제목에 이끌려 한 페이지를 펼쳐보곤 바로 대출 데스크로 갔던 기억이 난다. 제목만큼 이상한 그림으로 가득한 책이었다. 당연하고 쓸데없는 말을 당연스럽고 소중하다는 듯 써놨다. 감동이었다. '뭔가 잘될 것 같은 아침'이 '다 틀렸다 싶은 밤'이 됐을 때의 표정 변화 같은 것은 내 얼굴을 보고 그린 것 같았다. 아, 이건... 내 인생인가? 혹시 작가가 나였나 싶어 책 날개로 돌아가 작가 소개를 몇 번 확인하다 보니 책이 끝났다. 다 읽고서는 인생의 쓴맛을 조금 더 잘 견딜 수 있게 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책이 그런 것을 모아 팝핑 가루를 섞은 다음 사탕으로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웃었던 기억이 난다. 사진도 찍었다. "달고 맵게 조려주쇼!" 같은 그림.



  작가의 이번 책은 내 앞에 먼저 빌려 간 어린이가 있어서 예약을 하고 기다려야 했다. 인기 작가구나. 귀한 책이다 <더우면 벗으면 되지>. 먼저 읽은 선배가 늦지 않게 반납해준 덕분에 기다림은 길지 않았다. 예약도서를 받으러 오라는 문자에 가슴이 떨렸다. 더우면 벗으면 되고 그다음엔 뭘까. 사서 선생님은 책을 꺼내주며 웃었다. "뭐 이런 당연한 말을 제목으로..." 후후... 맞아요 선생님. 더우면 벗으면 되죠. 그런데 왜 가끔씩 그게 그렇게 어려울까요. 선생님껜 눈웃음으로만 화답했다. 엄지손톱보다 얇고 손바닥보다 작은 책을 가방 속 깊은 곳에 넣고, 괜히 서가를 서성이고 다른 책들을 몇 시간씩 뒤적거리면서 마음속에 기대를 한껏 머금은 뒤에 집으로 돌아왔다. 두 손을 비벼가며 곱게 펼쳐 읽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상한 책이긴 매한가지다.'


  이런 책이 왜 어린이 도서관에 있을까? 인생을 쉽게 만들어주는 듯하면서도 동시에 조롱하는 듯한 이 기묘한 책이 말야. 아니야, 아니다. 내 생각이 틀렸다. 애초에 이런 쉬운 방법이 있다는 것을, 생각보다 문제가 간단히 해결된다는 것은 인생 초기에 배울수록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다 커버린 어른들은 "뭐 이런 당연한 것을...." 하며 거들떠보지도 않으니까. (사실은 책에 나온 것 대로도 못 하면서....) 그러니 사실 이 책은 어른 도서관에도 다섯 권은 꽂혀 있어야 한다. 뭐 그렇게 대단한 신념과 무너지지 말아야 할 자존심이 있답시고 한없이 땅속으로 꺼지느냔 말야 어른들은. 얇고 가볍고 그림이 크다고 어린이 도서관에만 넣어 놓은 거라면 사서 선생님의 큰 실수다. 이 책은 "이게 뭔 책이야~ 엉?"하는 자만한 얼굴로 집어 든 어른들을 그 자리에서 "허어어엉..."하게 할 책인 것을.


  표지 합쳐 서른여섯 장도 안 되는 책을 한장 한장 넘기고 있자면 왜 웃다가 눈물이 날 것 같은지. "더우면 벗으면 되지" 따위의 자칫 성의 없는 말을 서른 장 내내 해주니까 '이 사람 진심인데' 싶어지며 숙연해진다. 그러니까 별스럽지도 않은 말도 진심으로 하면 위로가 되는 거였다! 곧이어 "더우면 벗으면 되지"로부터 시작한 당연한 말 대잔치는 "세상이 변했다면 - 나도 변하면 되지" 같은 말이 되는데, 역시 쉬운 이런 말이 진심을 담고 있는 바람에 마음을 조금 더 단단히 동여매게 됐다. 등 툭툭 두드리며 저 말을 해주니까, 그래도 된다고 말해주니까 한 번쯤은 더 견뎌 볼 힘이 생기는 것이다. "학교 가기 싫어!"라는 말에 "그럴 거면 다 때려치워!"가 아닌 "그렇게 싫으면 오늘은 가지 말까?"라는 대답이 돌아오면 "어, 어... 일단 오늘은 갔다 올게." 하게 되는 느낌이랄까. 안 하는 걸 언제든 할 수 있다면 지금은 한 번 해보자, 하게 되는 그런 마음. 나는 어쩌다 다 잊어버리고 있었을까? 언제든 그만할 수 있다는 것을.


'더우면 - 벗으면 되지'가 

'더우면 - 언제든 벗을 수 있어'로 읽히고, 

'더우면 - 언제든 벗어도 되는 거야'로 들릴 때쯤 마음속에서 뭔가가 올라온다. 그런 것쯤 나도 알아! 라고 뻐기는 나 같은 인간을 흐물흐물 녹게 하는 요시타케 신스케 작가는 사실 마법사인가. 그림 한 개에 마법 가루 한 꼬집씩 뿌려 책을 낸 것 같다. 몸과 마음이 가벼워지는 이 효과가 얼마나 오래갈지는 모르겠지만 책이 워낙 작고 가벼워서, 마력이 좀 떨어진 것 같다 싶을 때 언제든 꺼내서 충전할 수 있다는 게 큰 장점이다. 그래서 이 책은 사야 돼, 사놔야 돼. 11,800원.







더우면 벗으면 되지, 요시타케 신스케 지음, 양지연 옮김, 주니어김영사,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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