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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슬 Jun 28. 2021

좀머 씨 이야기

틀에 박힌 빈말

  한여름의 사당동엔 삼선 슬리퍼를 질질 끌고 뜨거운 동네를 어슬렁대는 아저씨가 있다. 머리는 빡빡 깎고, 이가 하나도 없는 것 같은 입을 하고 무언가 우물우물 하면서 걸어 다니는. 아저씨의 젊은 날은 어땠을까. 그런 것이 있기는 했을까. 뭘 하며 살았을까. 뭘 하면서 살았기에 저런 얼굴을 하게 됐을까. 왜 맨날 슬리퍼를 신고 다닐까, 겨울에도 저걸 신었던가. 그 동네에 10년을 살면서 다른 계절에도 그 아저씰 봤을 텐데 도통 떠올릴 수가 없다. 그 아저씨는 언제나 너무 더운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다 녹아버릴 것 같은 여름 날만 사는 사람 같았다. 나는 언덕배기 고갯길에서 까맣게 탄 그를 마주칠 때마다 바라고 또 바랐다. 저 아저씨에게 신이 있기를. 믿고 의지하는 신이 있기를. 가끔은 그렇게 삶을 속여서라도 행복하기를. 억지로라도 행복하기를. 마음이 주제를 넘어 볕에 익은 보도블럭으로 넘실넘실 흘러내렸다. 


  어려운 일을 당한 사람들의 입에서 신의 존재를 전해 들을 때마다 나는 궁금했다. 얼마나 참혹한 일을 겪었어야 당신이 당신의 지금에 감사할 수 있는 걸까. 당신은 지금 당신이 어떤 상황인지 정녕 모르는 걸까, 아니면 열심히 자신을 속여서 죽어버리지 않을 방도를 찾는 것인가. 일을 갓 시작했던 시절에는 내가 먼저 신의 이야길 꺼내기도 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이 틀에 박힌 빈말이라는 것에 놀라 입을 다물었고, 그다음부턴 좀 헷갈리기 시작했다. 누군가 먼저 신의 이야기를 꺼내면 잠잠히 듣고, 가끔은 믿기도 했고, 믿으려고도 해봤고, 믿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가끔씩 울었다. 신이라는 존재가 내 속에서 점점 더 납작하게 눌려 틀에 박혀버렸기 때문에 울었다. 실망스러워서. 내 삶과 내가 마주치는 삶들은 어떤 틀에도 맞춰 들어갈 수가 없게 되어버렸는데, 신이란 작자는 자기 혼자 쉬운 틀에 박혀버린 것에 배신감이 들었다. 삶이 걷잡을 수 없이 울렁이는 데 반해 그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종이 인형 노릇이나 하며 옮겨 다니는 것에 화가 났다. 

  하느님, 당신은 이 세상에서 틀에 박힌 빈말이 되었어요. 분발하셔야 합니다. 얘기를 좀 해보세요. 말을 좀 해보세요. 그 납작한 모양에서 벗어나 살아나 보세요. 생각해봐요, 2천 년이면 누구든 납작해지고도 남을 시간이에요. 너무 오래 끄셨잖아요 시간을. 


  이런 내 마음엔 아랑곳하지 않고 신에 대한 얇디 얇은 전단은 끝없이 쏟아진다. 세상엔 변하기 마련인 첫 마음에 진심인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 같은데, 주로 그 사람들이 발 벗고 나서서 내 따귀를 때린다. 너는 왜 변했니, 너는 왜 변했어. 너는 신을 등진 거야, 그게 죄라는 걸 너는 몰라? 나는 그 사람들이 싫어 눈을 가리면서도 우리 엄마가 '하나님의 뜻' 같은 것을 운운할 때 안심하고, 동생이 함께한 식탁에선 식사 기도에 아멘 하는 생활을 한다. 엄마가 남편을 잃고 우울한 여생을 사는 것보다는, 신이 우리에게 최고로 잘해주고 있다거나 모든 일에는 의미가 있다는 강박에 가까운 믿음을 갖는 게 낫다고 생각해서. 신이 우리 인생에 딱히 그렇게까지 개입하는 것 같지 않은 데다가 누군가를 과보호하는 스타일의 머저리도 아니라고 믿고 싶지만, 동생의 삶에선 좀 달랐으면 해서. 저 애만큼은 매일매일 행복했으면 해서. 보이지 않는 누군가에게라도 고마워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삶을 살기를 바라니까 나는 아멘, 한다. 아멘은 "언니 따라 하지 마"의 준말. 나는 까매진 발에 밀가루를 묻혀가며 가정과 세계의 평화를 지킨다. 천국은 내가 가야 하는 건데.... 


  그런 사람도 있는 것이다. 어떤 조미료도 치지 않고 삶의 쓴맛을 견디는 사람이. 어떻게 해도 그냥 덮어씌울 수 없어서 고통의 껍질을 벗겨내 끝내 그 속의 것을 대면해야만 살 수 있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누군가는 좀머 씨의 인생을 비극이라고, 그의 삶을 보며 자신은 의미 있게 살아야 겠다고 생각했다지만 나는 궁금하다. 하염없이 걷고 또 걸어 제자리에 도착한 좀머 씨의 삶에는 의미가 없는 건지. 어떤 사람은 그렇게, 누군가 보기엔 단 한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로 가끔은 다시 엄마 뱃속으로 들어갈 것처럼 맹렬히 과거를 향해 쏟아지는데 그건 삶이 아닌 것인지. 어차피 인생은 한평생 무언가로부터 도망치듯 어딘가를 향하다 끝나는 것인데 그 방향이 좀 다르면 안 되는 것인지. 게다가 "그만 좀 해요. 그러다 죽겠어요!"라는 말에 "그러니 제발 나를 좀 그냥 놔두시오!"라고 대답할 수 있으면 된 것 아닌가. 그만큼 저항하고 반발할 수 있었으면 된 것 아닌가. 그러니. 제발. 나를 좀. 그냥. 놔두시오. 


  나는 좀머 씨가 '어떠해야 했는지' 따위 생각하고 싶지 않다. 교훈 같은 것은 없다. 그가 무엇을 어떻게 극복했어야 했고, 어떻게 삶을 다시 일으켰어야 했으며, 세상과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력을 끼쳐야 했는지 따위가 있을 수 없다. 왜인지 사람들은 "저는 할 만큼 했습니다"라는 말을 좀처럼 믿어주지 않는다. 그러니까 좀머 씨는 끝까지 혼자였고, 그렇게 해서 틀에 박히지 않은 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물가에 동동 뜬 모자가 된 사람. 그 누구도 어떻다 감히 말할 수 없고 정리할 수 없는 인생이 되어버렸다. 뭐, 그럼에도 어떤 사람은 좀머 씨의 마지막을 두고 "어머 그 사람 교회 다녔다니, 안 다녔다니" 두 가지의 가능성만을 재겠지만... 그건 그 사람의 삶에 관한 말이지 좀머 씨의 삶과는 관계가 없는 말이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틀에 박히지 않은 것이란 대부분 외롭고 대부분 슬프고 대부분 마음이 찢어진다. 차라리 이 세상의 모든 이야기가 단순한 해피엔딩이면 좋을 텐데.

그때, 신이 그의 울음소리를 들었어요.
그때, 신이 그를 찾아왔어요.
그때, 그는 빛을 보았어요.
그때,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어요.
그때, 그의 마음속에 있는 슬픔이 씻은 듯 사라졌어요.
...그는 신에게 감사했어요.

차라리 모두의 삶이 틀에 박혀버린다면. 길 없는 슬픔을 헤매는 이 없이, 모두가 정해진 행복을 걸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아는 신은 좀 못돼서 그런 걸 허락하지 않지만.







좀머 씨 이야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장자크 상페 그림, 유혜자 옮김, 열린책들,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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