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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재우 Nov 10. 2016

#184 무현 : 두 도시 이야기

자랑은 아니지만, 사실 나는 눈물이 적은 편이 아니다.


노래를 듣다가 울컥하거나 책을 읽다가 왈칵 솟은 눈물에 행간이 흐려지는 일도 종종 있다. 대학교 때 중앙도서관의 서고에서 책장을 넘기다가 줄줄 운 기억이 난다. 그것도 서서 말이다. 다산 정약용의 제자였던 황상이 스승의 부고 소식을 접하고 썼던 글이었다. 그러니 어두컴컴한 영화관에서 눈시울이 붉어졌던 일들이야 말해 무엇하랴. 자랑거리는 아니지만 나는 그런 사람이다. 그래도 어쨌거나 그 모든 훌쩍거림은 혼자 있는 곳에서였다. 눈물이 흔하다고 해서, 눈물을 보여주는 일까지 흔한 것은 아니다. 


그런 내가 사람들이 많은 자리에서 운 것은 두 번이다. 


우선 두 번째는, 군대에서의 일이었다. 2009년 여름의 한 복판. 논산훈련소였다.


우리 연대에 투스타가 방문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에, 새카만 얼굴의 훈련병들은 개미처럼 새카맣게 흩어져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 20리터짜리 흰색 플라스틱 물통의 겉면에 매직으로 써놓은 '2소대' 따위의 글씨를 손으로 문질러서 지우는 것이 우리에게 떨어진 작업이었다. 사포라도 몇 장 주면 나을 것을, 우리에게 지급된 것은 고작 설겆이 할 때 쓰는 초록색 수세미였다. 철수세미도 아니고, 그냥 초록색 수세미 말이다. 수세미로 물통의 매직 글씨를 지우는 말도 안되는 짓을 하면서, 우리는 조교가 보지 않는 사이에 자갈을 쥐고 긁어 보거나나  시멘트 벽 모서리에 통을 갉으며 투덜거리던 중이었다. 


그때 문득 저 멀리 연병장 정면에 걸린 태극기가 이상하게 보였다. 파란 하늘 아래, 바람에 나부끼는 태극기는 한 폭 만큼 아래로 내려온 채였다. 조기(弔旗)였다. 기분이 이상했다.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물론 태극기가 조기로 걸리건 말건, 물통을 문지르고 있는 서른을 앞둔 늙은이 훈련병이 관심을 가질 필요는 없었다. 게다가 조기가 걸린다 해도 그 이유는 다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왜 조기가 걸렸는지 알 것 같았다. 텔레비전은 물론 신문조차 보지 못한, 그러니까 세상과 격리된 지 서너 주가 지난 즈음인데도 까닭없이 짚이는 일이 있었다. 나는 물통을 들고 우리를 감독하고 있던 조교에게 갔다. 그리고 물었다. 


"혹시 김대중 대통령님 서거하셨습니까."


조교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말없이 내 자리로 돌아와 다시 수세미를 들었다. 수세미를 들어 물통을 문지르는데, 까닭없이 자꾸 눈물이 났다. 눈물을 참으려 더 빠르게 손을 움직여도, 눈물은 빨라진 손처럼 더 빠르게 솟았다. 나는 거의 무릎이 닿을 정도로 다닥다닥 붙어있는 바로 옆 훈련병들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수도꼭지를 최대한 틀었다. 꼭지에서 물이 흰 물통 위로, 내 얼굴 위로 번갈아 쏟아졌다.


첫번째는, 그보다 두 달쯤 전의 일이었다. 


입대 날짜를 받아든 나는 지긋지긋한 법학 서적들을 책꽂이에 꽂아 넣어가며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텔레비전 뉴스에서 '노무현 대통령 서거'라는 믿기지 않는 소리가 흘러 나왔다. 자살로 추정된다는 더 믿기지 않는 이야기와 함께였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한 달 남짓 뒤에 내가 군대를 간다는 사실보다 훨씬 더 현실감없는 그런 이야기였다. '왜 그랬을까'라는 물음도, '누가 밀었겠지' 음모론도, 대통령 기록물이나 논두렁 시계 따위를 신문 1면에 써 갈겼던 이들에 대한 분노도,  머릿속에 떠오를 자리가 없었다. 그저 멍했다. 그저 멍하고, 멍했다. 


울음이 터져나온 것은 국민장 때였다. 시청 앞 광장 쪽으로는 사람이 너무 많아 갈 수가 없었다. 나는 삼성본관과 숭례문 사이를 오가며 사람들 사이를 떠다녔다. 노란 종이와 까만 만장이 휘날렸다. 사람들은 욕설을 내뱉든, 소주를 병째 마시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든 각자 자기의 방식대로 노무현 대통령을 추모하고 있었다. 오래지 않아 장례식이 끝났고, 운구 행렬이 움직이기 시작한다는 뉴스가 들려왔다. 시청앞 광장에서 숭례문까지, 거기까지 거리통제가 이어질 거라는 말도 들었던 것 같다.


저 멀리서 운구차가 보였다. 아니, 이쪽으로 밀려오는 사람들의 물결이 보였다. 동시에 저쪽으로부터 염료가 무명 옷을 물들이는 것처럼 느리지만 확실하게, 울음소리가 거리를 물들이기 시작했다. 나는 사람과 울음의 물결에 떼밀려 아래로 아래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삼성 본관을 지나, 숭례문을 조금 지나, 서울역 고가도로가 저만치 보이기 시작했을 때, 그때서야 내가 있는 곳 앞으로 운구차가 지나갔다. 까만 차 지붕 위에서, 영정 속의 얼굴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 환한 웃음을 보며, 나는 사람들 속에서 울었다. 그때 문득, 2002년 겨울 대선 개표를 밤새 지켜보다가 친구들과 너무 좋아 같은 순대볶음 집을 두 번 갔던 기억이 났다. 봉하 마을 구멍 가게의 의자에 앉아 담배를 물던 대통령의 모습도 기억났다. 울음에 순대볶음의 양념과 담배 맛이 뒤섞였다.


시간이 흘렀다. 두 번의 울음으로 시작한 군대 생활은 육군 병장으로 무사히 제대를 했고, 노란 색깔이 좋아 안과 밖을 온통 노랗게 칠한 노란 카페를 차렸다가 접었으며, 별 고민이나 계산없이 들어갔던 회사에서는 과장을 달고 5년째 지내고 있다. 책을 쓰고, 팟캐스트를 하고, 말과 글을 끄적대며 하루하루 지내는 사이에 어느새 서른의 중반을 봉우리 넘듯 확실하게 넘어가는 중이다. 그렇게 내 부지런히 내 앞가림을 하는 사이, 시간은 잘도 흘렀다. 


어제는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되었다. 이 땅에서 날마다 쏟아지는 '비상식의 증거'들도 읽기도 벅찬데, 이젠 바다 건너 들려오는 비상식에도 귀를 열어두어야 할 생각을 하니 피로감이 몰려왔다. 나는 "세상이 계속 좋아질 것이라 믿는 근대 문명이 그 수명이 다했다."는 어떤 교수님의 시대정신 진단을 스크랩하며 한숨을 쉬었다. 


맥락없이 연차 휴가를 내고 영화관에 갔다. 노무현 대통령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였다. <무현 : 두 도시 이야기>는 상영관이 많지 않았다. 평일의 한낮인데도 극장 안에는 제법 사람들이 있었다. 정치 1번지라는 종로 국회의원의 프리미엄을 버리고 부산으로 내려왔던 2000년 총선의 노무현이 담겨 있었다. 의도적으로 감정적인 동요를 줄이려고 생각하며 찍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영화는 격한 배경음악 한 번 없이 메이킹 필름처럼 담담하게 돌아갔다. 그래도 90분 내내 훌쩍이며 영화를 보던 사람들은 영화가 끝나도 일어서지 않았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전인권의 '걱정말아요 그대'가 비상식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를 위로하는 듯 다독였다. 


<무현 : 두 도시 이야기>에서 내가 제일 많이 울었던 장면은 노무현 대통령의 전속 사진 기사분의 이야기였다. 

인터뷰어가 그에게 물었다. "사진 찍기 전에 뭐라고 이야기 하나요?"

그는 "대통령님, 촬영하겠습니다."라고 말한 뒤에 카메라를 든다고 답했다. 

인터뷰어는 장례식의 사진도 그가 찍었냐고 물었다. 

사진 기사 분은 고개를 끄덕였다. 

장례식 때도 자신이 찍었다고.

그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더니, 울먹이며 읊조렸다.

그때도 사진 찍기 전에, 대통령님에게 똑같이 말씀드리고 찍었습니다. 


대통령님, 촬영하겠습니다.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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