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Loud Silence
Sep 23. 2024
밤9시.편의점.컵라면.밤산책
위로받아야 하는 시간과 위로를 건네는 시간
어젯 밤 9시에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은 갈등의 연속 이었다. 집에 가서 야식을 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 이른 저녁을 먹은 탓에, 자기 직전에 이렇게 배가 출출하다. 이른 저녁을 먹을 때만해도, 빨리 먹고 빨리 잠에 들면, 내일 아침에 상쾌하게 일어날 수 있겠다는 계산과 기대가 있었지만, 그 길은 험난했다. 역시 건강의 길은 쉽지 않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으며, 지금 당장의 욕구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에 빠진다.
집에 가서 라면 하나를 해치우자니, 너무 부담된다. 너무 늦은 저녁은 아니지만 정말 라면 한 끼를 하자니, 이르게 먹은 저녁이 눈에 아른 거린다. 그럴거면 뭐하러 일찍 그렇게 먹었냐며.... 하지만 도대체 건강한 야식이 떠오르지 않는다. 막상 인터넷으로 찾아볼 때는 되게 많았던거 같은데 꼭 이런 순간에 떠오르지 않는다. 그저 라면밖에. 그러니 컵라면에 만족하기로 한다. 집에서 먹는 것은 쓰레기가 나오고 또 치워야 하니, 가까운 편의점에 앉아서 먹고 가기로 한다.
편의점에 들어서자, 막상 어떤 컵라면을 먹을지는 또 다른 문제다. 늦은 저녁이기에, 조그마한 컵누들 같은 것을 먹자니, 이제껏 내가 했던 고민들이 초라해진다. 아주 사치스럽고 문제적인 감정이다. 건강을 생각한다면 가장 담백하고 사이즈가 작은 컵라면을 골라야 한다. 그러나 밤9시에 컵라면을 먹으려고 들어간 한 사람에게는 유효하지 않은 선택지 이다. 안타까운 인간의 본능이다. 커다랗고 화려한 컵라면들만이 눈에 들어온다. 부대끼는 것은 다음 날의 본인일 뿐.
편의점은 내게 많은 것을 허락해주지 않는다. 먹을 수 있는 자리도 넓지 않고, 편한 옷을 입고 먹을 수도 없다. 유리창 밖에는 수많은 타인들이 스쳐지나가며 나를 볼 수도 있고, 보지 않을 수도 있다. 편의점의 온수가 90도인 것도 사소하게 아쉽다. 냉장고를 쓸 수도 없으니, 김치같은 반찬을 꺼내먹을 수도 없다. 장을보고 손에 들려있는 참기름과 두부도 어디 떨어지지 않을 곳을 잘 찾아 두어야 한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내가 선택한 컵라면은 '김치 왕뚜껑'이다. 김치를 따로 사지 않아도 되는 간편함과, 먹었을 때 나름대로의 포만감을 보장해주는 선택지로 아주 훌륭하다.
절반 정도 먹으니 역시 양이 적지 않다. 다 먹을 수야 있지만, 이걸 다 먹으면 힘들 다음 날이 이내 마음에 걸린다. 그렇지만 이미 반을 먹은 것을 어떡하리. 반만 먹고 버릴 수는 없으니, 마저 잘 먹고, 대신 국물은 버리도록 한다. 국물을 버릴 때, 내 마음의 짐도 같이 흘러내려가고 딱 이만큼만 아침에 가볍기를 바라며... 마지막 디저트로는 바밤바를 집었다. 국물은 버려도 디저트는 포기할 수 없지 않는가. 최근 슈링크플레이션으로, 대부분의 아이스크림 사이즈가 줄어들었는데, 밤에 간단히 먹을 용도로는 그것이 오히려 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과 그래도 낮에 먹으면 콘 사이즈의 아이스크림을 먹어야 겠다고 생각하며 집을 들어간다.
야식을 즐기는 타입은 아니지만, 최근 야식의 횟수가 좀 늘었다. 시간이 지나고 일상이 흐르면서 나를 가만히 두지 않는다는 것은 알지만, 항상 더 큰 파도가 나를 맞이하는 것 같다. 그에 따라 나도 더 커져야 하는데, 그 시점이 조금만 늦어져 버리면, 나는 넘어져버리는 것 같다. 그러다가 다시 일어서 나가다보면 또 그만한 파도는 지나가기 마련이지만, 다행이다 싶을 때 다시 커져오는 파도에 지쳐버리는 것도 지치는 시간이 있는 것이다. 바다의 파도는 작기도 하고 크기도 하지만, 인생의 파도는 다시 작아지지 않는다는 것이 내 경험이다.
직장에서 중간에 프로젝트에 투입되게 되면, 중심을 잡기에는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린다. 대부분의 프로젝트는 다른 팀원이 있기 마련이고, 그 안에서 이미 합의된 것들을 쫓아가야 한다. 많은 것이 당연하게 흐르지만, 나에겐 당연하지 않기에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야 하고, 이러한 내 모습에 화가 난다. 회사에 심술을 부리는 시기도 있었지만,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냥 나에게만 심술을 부려보기로 한다. 사실 당장 따라가지 못하는 현상 자체는 타인의 이해가 있다면 충분히 넘어갈 수 있으나, 이러한 상황을 해치고 나만의 결과를 내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릴 것임을 알기에, 그 시간의 무게가 지레 나를 짓누르는 것 아닐까. 결과에 대한 부담은 언제나 나를 긴장시키는 것이다.
이런 저런 생각에 다 먹은 아이스크림 막대기를 버리고, 안락의자에 앉아 가만히 내일을 준비한다. 아마 당장은 잠에 들 수 없으니, 책을 읽거나, 다음날 해야할 일을 떠올려 봐야 겠지. 그러다가 아직 시간이 필요하다 싶으면 영화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창문을 닫고 고요해진 집안에서, 기쁘게 들어간 야식과 반갑지 않은 회사내에서의 부담감이 공존하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