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되고 나서는 크게 울지 않는다. 어릴 때는 슬프면 울었는데, 어른이 되면 울지 않는다. 슬픔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나, 슬프더라도 울지 않도록 훈련한다. 다만, 혼자 있을 때는 가끔 우는 경우가 있다. 운다면 아마 혼자서 눈물을 훔치고, 나중에서야 주변 사람들에게 혼자서 울었다고 고백하는 순간들이 더 흔하다. 아마 주변 사람들이 나의 울음을 부담스러워 할까봐, 더 나아가 나의 울음이 나를 대하는 타인의 행동에 영향을 줄까봐 그런 것 같다. 울음은 어쩌면 수많은 변수를 가져오는 것이다.
울고 싶었던, 혹은 혼자 울었던 순간들을 떠올려 보면 잘 기억나지도 않는다. 망각은 신의 축복이라고 했던가.(아마 이터널 선샤인...) 나빳던 기억들은 먼저 잊고 싶을 것이다. 떠나간 사람의 빈자리에 좋은 기억이 많이 남아있고, 그리운 마음만 남아있다면 참 예뻣던 시절임이 틀림 없다.(아마 야생화....) 그러니 그립다는 것은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것이 아니라 그 시절이 좋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 순간들은 모두 잊게 되었을 것이고, 모두들 그러길 바란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되짚어보면 한 방울의 눈물 부터, 세상이 떠나가라 울었던 순간까지 기억나는 것들이 있다. 스스로가 별로라고 느껴질 때, 남에게 무시당했을 때,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갈 때, 믿었던 사람이 배신할 때, 외로울 때, 아플 때.... 그리고 그런 순간들은 한 번만 찾아오지 않았던 것 같다. 이별은 반복되고, 외로움은 잊혀지지 않았다. 다시 찾아오는 아픔은 어른이 되었다고 잘 견뎌지지 않았다. 감기몸살은 어른이고 아이고 약을 먹지 않으면 낫기가 쉽지 않다. 약을 먹지 않고 버틴 순간도 있었겠지만, 그렇지 않은 순간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지. 실수하지 말아야지. 다시는 나 스스로를 깎아내리지 말아야지. 다음에는 이런 순간들을 멋지게 해내야지. 똑같은 파도가 온다면 지금은 넘어졌지만, 다음엔 잘 넘어야지. 스스로 하는 다짐들이 떠오른 다면 성공이다. 다시 일어설 수 있다. 다수의 실패에 대한 면역을 갖고 있는 것이 어쩌면 굉장한 지능이 아닐까. 그런 지능은 어떻게 얻어지나. 쓰러지지 않는 자존감. 나는 결국 해낼 것이라는 나에 대한 믿음. 나는 여기서 멈출 사람이 아니라는 낙관은, 그 바보같지만 부럽도록 천재적인 생각들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쉽지 않은 길이다. 타인의 눈치도 봐야하고, 내 스스로의 기준을 맞춰야 한다. 타인의 눈치는 너무나 다채롭고, 나의 기준은 어제보다 높다. 어제의 나도 굉장한 나였기 때문에, 그 굉장함을 넘어서려면 나는 또다시 피땀을 흘려야 하겠다. 타인의 눈치는, 대다수의 사람의 욕망만큼 다양하다. 가끔은 그 욕망들이 너무 단일해보이기도 하다. 하지만 시야를 넓혀보면 공부를 잘하고 싶은 학생과, 친구를 많이 사귀고 싶고, 운동을 잘하거나 노래를 잘하고 싶은 사람들로 넘쳐난다. 그리고 이것을 모두 잘하고 싶은 사람, 혹은 실제로 잘하는 사람은, 그 모두를 만족시키고 결국 행복해졌을까. 나의 기준이 중요하다고 해서, 어제의 나를 넘어선 나는 결국 행복해졌을까.
나는 왜 무너졌을까. 분명 내가 선택한 길이고,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왜 실패와 슬픔에 무너지는가.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나를 무너뜨리는 것은 '기대'인 것 같다. 내가 선택한 길을 내가 아무 무리 없이 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혹은 자만. 겸손이라는 것은 타인에게 나를 낮추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스스로를 스스로에게 낮출 필요도 있어보인다. 이 과정에서 자존감을 낮춰서는 안되겠지만, 스스로를 너무 과신한 나머지, 무너지게 되는 것 아닐까.
그 길을 걷는 나에게 집중하지 말자. 내가 넘어지고 안넘어지고는 중요하지 않다. 그 길을 어떻게 걸을지만 생각하자. 나아가자. 넘어지면 일어나고, 왜 넘어졌는지만 생각하자. 물론 그래도 가끔 힘들어서 울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나아간 그 길의 끝이 당신에게 전에 없던 보람을 선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