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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본다. 볼 수 있다. 비록 한쪽 눈이지만

스물 일곱 가을, 응급 안과 수술실에서 시작된 이야기

by 이손끝

나는 본다. 아직까지는.


스물일곱. 망막 수술을 받았다 왜인지 장애등록은 그로부터 13년이 걸렸지만,

재작년 '한쪽 눈이 0.02 이하의 시력인 자'로 인정받아 시각장애인이 됐다.

신분증이 운전면허증, 주민등록증 말고도 하나 더 생긴 셈이다.


포토샵 보정을 얼마나 때려 넣은 건지 내가 봐도 내가 아닌 사진이 박혀있지만,

그래도 북파공작원처럼 나온 여권사진보다는 나은걸, 후후.


나, 복지카드를 가진 여자다. 뚜둥.


시각장애, 장애인, 망막박리.png 장애등급을 받기까지 13년이 걸렸는데, 병원 측 서류가 잘못됐었고, 그걸 모른 채 시간이 지났다. 결국 행정사의 도움을 받아 장애 인정을 받게 됐다.



나는 견인성 망막박리였다.

망막 위·아래에 섬유성 막이나 신생혈관 조직이 자라 기계적으로 ‘당겨서’ 망막이 들뜨고 떨어져나가 한 쪽 눈을 잃었다.

가장 흔한 열공성 망막박리보다 증상이 모호하고 진행이 느려서 잘 모를 수 있다고 한다.

수술을 받았을 때는 이미 망막의 4분의 3이 떨어진 상태였다.


그렇다해도 거의 남아있지 않을 정도가 될 때까지 정말 몰랐다고?

언제부터 망막이 떨어져 나갔을까?

정말로 정말로 모르겠다.


고시원에서 화장실 청소해 가며

하루에 10시간씩 그림 그렸던 스무 살에?


재수해서 미대에 갔더니,

돈이 어찌나 많이 들던지.

미술학원 알바를 두탕 세탕 뛰며

서울-경기도를 오가는 막차를 타려고

전력질주 했던 시절에?


아니면 무작정 떠난 인도에서,

내 소울도 놓고 내 망막도 놓고 왔던 걸까.


그것도 아니면 내일이, 앞날이

도무지 잘 보이지 않아서 내 눈도 흐릿해졌던 걸까.


아마도 몇 년에 걸쳐 박리가 되었을 거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아니고서야 교통사고 같은 큰 충격이 없었는데

망막의 4분의 3이 갑자기 떨어져 나가지는 않을 테니까.


어느 순간 눈이 쉽게 피로해지다 싶었고

한쪽 눈씩 가리면 왼쪽 눈으로는 상들이 왜곡되어 보였다... 지만,

워낙 눈이 나빴기 때문에 안 보이던 게 조금 더 얼룩져서 안 보였달까.


h-co-P_fMqU34A3I-unsplash.jpg 사진: Unsplash의 H&CO


“조금 더 돈 모아서 언니처럼 라섹해야지.”


지금은 돈이 없으니 내년에, 그

리고 그 내년이 올해가 되면

또 그다음 해를 기약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 스물일곱.

렌즈를 맞추려고 했었나? 시력 검사를 받기 위해 안과에 갔다.

아무래도 이상하니 큰 병원에 가보라고 했다.

그리고 대학병원에 갔더니 갑자기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초진을 한 의사는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화를 냈다.


“아니 이렇게 될 정도로 몰랐다고요?

몰랐다는 것도 이상한데?”


(왜 반말이시죠…)

“눈이 나빠진 줄로만 알았어요.”


망막 박리는 응급이다.

떨어졌을 때 바로 붙여야 한다.

망막은 재생이 되지 않는다.

그러니 수술을 받는다는 의미는

그냥 떨어진 벽지처럼 남은 망막을 벽에 붙이는 거지

다시 볼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떨어진 벽지 사이로 먼지 같은 게 들어가면 벽지가 잘 안 붙게 되는 것과 같다.

박리가 되었다면 지체 없이 수술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 사실을 몰랐다.

그것도 모르고 병원에 이제야 온 내가,

이미 망막의 4분의 3을 어딘가에 떨어뜨리고 온 내가 의사로서는 어지간히 충격적이었나 보다.



“아니 풍선처럼, 눈이 풍선처럼! 퓨우우우우 하고 바람 빠지듯이 안구가 꺼질 수도 있다고요!!”



14년이 지났지만 잊을 수 없는 말.

의사는 내가 마주할 수 있는 최악의 가능성에 대해 말하며 연신 쉭쉭 소리를 냈다.


왜 그리 화가 났을까?

걱정돼서 그랬겠지만.

설마 하니 당사자인 나보다 화가 나고 기가 막힐까.


초진 후 거의 바로 수술을 받게 됐다.

유리체절제술.

예상 수술 시간은 2시간 반 정도.

전신마취를 하면 전신의 근육이 이완되면서 눈의 위치를 조절하는 안구 근육도 힘을 잃기에

눈이 고정되어 있으려면 국소마취를 해야 한다고 했다.


“국소마취 합시다.
잘 버틸 수 있죠? 젊으니까.
많이 아프지는 않을 거예요.”


아팠다.
진짜 jonnage 아팠다.


살면서 그렇게 굵고 긴 주삿바늘은 처음 봤으며,

그 바늘로 안구를 찔러대는데 안 아플 리가 있나?
게다가 나는 마취가 잘 안 된다. 한번 더 주사 바늘이 눈에 꽂혔다.

2시간 30분 걸린다던 수술은 4시간을 훌쩍 넘겨 끝났다.


안구만 마취된 채 너무도 말짱한 정신이었으므로

저 멀리 클래식 음악소리,

차가운 수술도구가 부딪히는 소리,

망막은 깨어 있고 빛은 느끼기에 수술 기구의 검고 흐릿한 무언가가 '보였다'.


흑백영화, 장애, 수술, 회복.jpg 사진: Unsplash의Hulki Okan Tabak
마치 지지직 거리는 고장 난 텔레비전으로
흑백 무성 영화를 보는 듯
눈앞은 쉴 새 없이 어지러웠다.

눈으로 수술도구들이 부지런히 들어왔다 나갔다.

담당 교수님은 피를 닦으라며 누군가에게 계속 소리를 질렀는데,

그는 잘 해내지 못했던 거 같다.

너무 고통이 심해 허벅지를 꼬집다 못해 순간 정신을 잃었다가도,

교수님이 하도 소리치는 통에 나갔던 정신도 금세 차가운 수술대 위로 돌아왔다.


무통주사 없이 23시간 걸렸던 출산보다 더 지독한 수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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