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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라면 그때를 위해 점자를 미리 배워두겠어."

by 이손끝


명랑하게 너는 말했지.
내가 너라면, 그때를 위해 점자를
미리 배워두겠어.
흰 지팡이를 짚고 혼자서 거리를
걷는 법도 익혀두겠어.
잘 훈련받은 멋진 리트리버를 사서
그 녀석이 늙어 죽을 때까지 함께
살겠어.


— 『희랍어 시간』, 문학동네, 2011, p.110


한강 작가의 <희랍어 시간>에 나오는 문장이다. 눈이 멀어가는 남자의 회상씬에 등장하는 인물이 남자에게 뱉는 말이다. 그들은 10대 시절 병원에서 만났고, 이런 말을 한 이유는 그녀 자신이 죽음의 경계를 수도 없이 오갔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신만큼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던 거다.

그러나 주인공은 마흔 살이 될 때까지, 눈이 정말로 멀어버리는 목전에 와서까지도 그 말들에게서 멀리 떠날 수 없었다.


내가 아는 이가

이런 말을 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본다.

오래오래 생각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물어본 사람이 나에게는 없었으므로,

나 또한 단 한 번도 그런 방식으로 나 자신을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

.

하지만,


나 우울해서 빵 샀어.


라는 질문에 나는 "무슨 빵?"을 입에 올리는 쌉T이므로,


처음 문장을 마주했을 때는 꽤 유용한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왜 여태 그 생각을 못했지?’ 하면서.

‘리트리버 고고?’ 하면서.





망막 수술을 하고 13년이 지난 후에야 장애등록을 하게 됐다.

공식 장애인이 되기까지 오래도 걸렸다.

이렇게나 시간이 많이 걸린 이유는 전공의 의 표기 실수로 병원에서 발급한 최초 장애진단 서류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그걸 몰랐고, 똑같은 서류를 가지고서

한 번 더 장애 심사를 넣었고 당연히 떨어졌다.


병원에서 준 서류에는 내가 눈이 멀지 않았어도 알 수 없는 말들이 가득했으므로,

제대로 살펴보지 않은 탓이 크다.


행정사를 통해 장애진단서 오류 발견했다


결국 행정사를 통해 표기 실수를 발견했고,

13년 만에 장애등록을 할 수 있게 됐다.


이토록 시간이 오래 걸린 이유가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겠지.

나의 머뭇거림으로

그 사소한 실수도

발견하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하지만 그 긴 시간 덕에

나는,

우리 가족은,

나의 장애를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 것 같다.





우리 가족의 자랑이자 특기는 별 수 없는 일에는 유난 떨지 않는 것이다.

그게 때로 해야 할 말도 하지 않게 만들기도하지만. (나의 유산에 엄마가 일언반구 하나 없었던 것처럼)


어쨌든 그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담백하다.


언니 :

"오, 드디어 장애인이 된 건가~. 축하해."

나 :

"어. KTX도 할인 돼."


언니 :

"아는 분이 망막수술받으신다는데 침울해하셔 가지고. 네 이야기를 좀 했지.

그랬더니 왜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냐고. 아무렇지 않지 않아야 하는 거야?"


나:

"언니, 아무렇지 않아야 할 이유도 없잖아?.“


언니:

"오~케이~"


요즘은 한 곳을 집중해서 오래 보기가 힘들다.

시력을 상실한 좌안이 우안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혼자 헛돌 때가 종종 있다.


엄마:

"oo아, 너 눈 돌아간다. 블루베리 많이 먹어."


남편:

"오늘 그룹 상담하는 데 눈이 약간 사시여서 고민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어. 자기 얘기를 해줬어.

가끔 자기가 눈이 그럴 때가 있는데 매력 있게 느껴진다고. 그건 생각하기 나름이라고."


나:

"그게 진짜 매력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남편:

"당연하지."




이런 사람들과 살기에

나는 나를 조금 더 긍정할 수 있다.


최악의 상황을 미리 그려보지 않고,

새끼 손톱보다 작았을 내 나머지 망막들이 여태 붙어있음에 감사하면서,


그러니 생각해 본다.


점자를 배울 것인가.

아주 멋진 리트리버를 들일 것인가.


오래 생각한 끝에 내린 결론은 이것이다.


명랑하게 나는 말한다.
점자를 미리 배워두거나,
혼자서 거리를 걷는 법을
익히는 대신

지금부터라도 남편과 아이 얼굴을
천천히 외워두겠다고.
엄마 얼굴에 있는
주름을 세워두겠다고.
언제나 씩씩한 언니의 뒷모습을
담아두겠다고.

나의 사랑을 의심할 수 없도록
남편과 아이에게,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사는 내내 손편지를 쓰겠다고.

봐주는 이 없어도
내가 '여기 있음'을
글로 남겨두겠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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