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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년놈의 역사

by 이손끝
시아버지한테 그렇게 이야기했다고?
미친 거 아냐?”


지난봄, 시댁과 다녀온 여행 이야기를 꺼냈더니 친언니가 했던 말이다.

예전부터 여기저기서 미친년 소리를 자주 들었다.

듣다 보면, 애정이 쌓이는 것도 같다.


남편의 외할머니댁을 방문한 날이었다.

외할머니가 계시는 시골집 근처 펜션에서 시부모님과 같이 하루를 묵었다.

다음 날, 할머니 댁으로 가기 전 선물을 사러 남편과 잠시 읍내에 나가려던 참이었다.


“야, 야” 하며 시아버지께서 현관문을 나서는 나를 부르셨다.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아버지, 야야 하지 말아 주세요. 이름 불러주세요. 저 예쁜 이름 있어요.”


시아버지가 당황하신 듯 말을 얼버무리자, 시어머니께서

“아니 그래, 왜 이름 놔두고 ‘야야’ 하는 거야” 더 당황해하며 대신 말을 보탰다.


“네~ 이름 불러주세요. 이름.”

할머니 드릴 선물로 빵 사라고 베이커리 쿠폰을 건네려던 참에,

며느리의 되바라진 응수를 들으신 셈이다.


그날 점심, 시외할머니를 모시고 읍내 식당에 갔다.

밥을 먹는 중에 시아버지께서 또,

“야, 야-” 하셨다.

나는 고개를 들고 말했다.

“아버지, 이름 불러주셔요. 이름.”

“아녀어-. 00(남편)이 부른거여.”

"오빠도 이름 있어요. 누구든 이름 불러주세요."


여기 ‘야야’로 불릴 사람 없어요.”



결혼 6년 차, 시댁에는 절기에 한 번 정도씩 갔고 시아버지는 말씀이 많은 분이 아니기에 우리 사이에 대화는 많지 않았다.


서로를 알기에 충분한 시간이 흐르지는

않았다고도 볼 수 있다.

영화 <도둑들>에서 말로만 듣던 희대의 도둑 선배 김혜수를 처음 보고 전지현이 한 대사가 생각난다.

유튜브 @무비가이드 쇼츠

시아버지는 내가 아직 ‘어~마어마한 X년’인 줄은 모르시는 거다.




나는 예의 바른 사람이다.

어른을 공경해야 한다고 배웠고,

학창 시절 도덕시긴에도 졸지 않았다.

사회생활을 하며 적당히 비위 맞출 줄도

알고 서로가 기분 좋을 말들도 곧잘 꺼낸다.


하지만 뭐랄까. 내 안에는 발작 버튼 같은 게 있어서, 이렇게 저렇게 봐도 아니다 싶을 때는 위아래 없이 참지 못할 때가 있다.




고등학교 시절, 기숙사에 살았다.

1, 2학년이 공동으로 화장실을 썼고,

세면대가 부족해 등교 시간 내에 못 씻을 때가 많았다. 몸에서 퀴퀴한 젖은 수건 냄새가 났다.

2학년 선배들은 수건으로 자리를 맡아두고 대놓고 새치기를 하곤 했다.

1학년들은 쩌리였다.

한쪽에서 동냥하듯 씻던 불쌍한 인생들.

몸에서 냄새가 아니 날 리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도 자리를 맡아 놓고

깜박한 칫솔을 가지러 갔다.

돌아와보니,2학년 선배가 내 자리에서 씻고 있었다.

그녀를 불렀다.

거품으로 얼굴이 하얘진 그녀가 짜증을

내며 돌아봤다.

“여기 제가 맡아놨어요.”

“뭐?”

“제가 자리맡아 놓고 잠깐 나갔다 온 거예요.”

“아니 뭐 이런 미친년이 있어? 여기 전세

냈니? 어디서 네 자리 내 자리야?”

“선배들도 그러잖아요. 왜 저는 그러면 안 돼요?”

“야 이 XXXXXX.”


결국 서로의 머리채를 잡고서야 끝이 났다.

선배니까 존중의 마음으로 선빵을

날리지는 않았다.

날아오는 손바닥에 맞장구를 좀 쳤을 뿐이다.


쿵 짝짝짝


3학년 선도부장의 중재로 우리는 화해의

악수를 했다. 하지만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내가 머리를 숙이면 그들은 다시 수건 따위로 비열한 권력을 행사할 테니까.

선배는 고개를 삐딱한 채로 돌아서는 나를

죽일 듯 노려봤다.


덕분에 기숙사에 내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됐다. 난 ‘의외로 되바라진 미친년’이 되었지만, 다행히 매일 아침 화장실을 무단으로

점유하던 무법자들은 사라졌다.


그 이후로도 발작 버튼은 드물게,

하지만 강렬한 방식으로 작동했다.


나를 가둬놓고 돈을 내놓으라던
사이비 종교 집단 앞에서도,
외국이라고 근로복지를
개나 주려던 회사 대표
앞에서도 말이다.
아, 말끝마다
‘여자가 말이야’를 붙이며,
세탁물을 매번 늦게 줬던
세탁소 사장 앞에서
보인 내 모습이야말로
희대의 미친년으로 불릴 만하다.


앞으로도 미친년 소리를 듣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괜찮다. 어차피 그건 또 다른 내 이름이니까. 내심 마음에 들기도 하다.


평소에는 예의 바르게, 하지만 필요할 때는 기꺼이 마주치며 살아갈 이름이었으면 한다.




짐깐,

이야기는 "미친년 혼자 잘 먹고 잘 살았습니다"로 끝나지 않는다.


여기 미친놈, 남편의 이야기도 있다.


강제 보충 수업?


남편이 고등학교 2학년 때.

문교부 지침으로 보충수업을 선택적으로 진행하라고 했으나, 다니던 학교가 전교생을 대상으로 강제 시행했다.

그는 문교부에 직접 신고를 했다.

그다음 날부터 학교 보충수업이 없어졌다.


남편은 이 이야기를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친구들에게조차.


공부 잘하는 애들만 상을 주는 건…!!!!


고등학교 졸업식날.

졸업식날 공부 잘하는 애들만 상을 주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 남편.

졸업식 후 그날 저녁,

정문 지나 학교 올라가는 아스팔트 바닥에 검은색 락카로,


'이딴 졸업식은 폐지하라'라고

썼다고 한다.

사진: Unsplash의boris misevic

그는 그 일도 비밀에 부쳤다. 이제는 공소시효가 끝났을 거라며 내게 이야기를 해줬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게 진짜 미친놈 같았다.




교수님, 그건!!!


대학교 4학년.

‘현대 음악의 이해’ 교양시간에 교수님이

여학우에게 여성을 비하하는 말을 했다.

그는 손을 들고,


남편: 그건 여성 비하 발언 아닙니까?

교수: 응, 자넨 F야.


실제로는 B학점을 받았다고 한다.




미침에도 레벨이 있다면,

그는 단연코 나를 넘어선 미친놈이었다.


내가 보통 불합리하다고 생각이 될 때,

냅다 목소리를 높이고 해드뱅잉을

하며 포효하는 것에 그쳤다면,


남편은 해결방법에 있어서

화끈한 놈이었다.


어느 대학생이 억울한 죽음의 진실을

밝히라며 길거리에서 화염병을 던진다든지

산불 났다고 구호물품 싣고

불이 나고 있는 곳으로 뛰쳐간다든지,

촛불과 함께 눈비 맞아가며 거리에서

노래를 부른다던지,

신발끈이 계속 풀린다고 냅다 접착제를

발라버린다던지 하는.


내가 위아래 없이 날뛸 때,

그는 앞뒤 가리지 않고 날뛰었다.


미쳐 날뛰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더랬다.

역시 부부는 끼리끼리 유유상종

초록이 동색이며 부창부수다.


세상은 가끔 미친년놈이 날뛰어줘야

조금 더 나은 방향도 있다는 걸

알게 되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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