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전기톱 주문했는데 노트가 왔다

ADHD 남편 기상 후 30분 집중 관찰기

by 이손끝
지난 3월 18일 연합뉴스 기사 제목을 보며 남편을 떠올렸다.

뉴스기사를 보면서 남편을 떠올린 건 처음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택배 사기 배송 기사에 남편이 생각나는 건 좀 아니지 않나 싶으면서도,

사기까지는 아니지만 우리 집에 오배송되어 온 것 같은 남편 혹은 A를 물어보거나 요청했는데 정말 아무 관련이 없는 B를 답하거나 해주는 남편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지난 3월 18일 연합뉴스 발 기사 제목이다.

...(중략)...네이버 아이디 '시**'은 지난달 26일 '요즘 알리 사기 배송 심하네요'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그는 "전기톱을 주문했는데 노트가 배송 왔고 무선 드릴을 샀는데 알 수 없는 물품이 왔다. 당황스럽고 무섭다"라고 밝혔다.






남편은 전기톱도 아니고 노트도 아니니 적확한 비유가 아닐지 모른다.

그렇지만 예상할 수 없는 그의 행동에 매일 당황스럽기는 하다.

무섭지는 않다. 몸무게는 내가 더 나가니까.


우리는 가난도 이혼도 장애도 극복한 커플이지만,

ADHD의 벽은 생각보다 높았고 그로 인한 나의 분노 또한 만만치 않았다.


ADHD라 괴로운 자신의 이야기 혹은 아이를 키우면서 느끼는 어려움을 다룬 글이나 방송은 꽤 있던데,

ADHD의 배우자 입장에서의 이야기는 없어 보여 몇 마디 남겨본다.

(그래놓고 3부작.... 할 말 많은 나....)


연애할 때 남편은 자신이 ADHD라고 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신도 몰랐으니까.


나도 연애할 때는 몰랐다. 그저 길 잃은 어린양인 줄 알았....


당연히 관련해서 병원에 간 적도 없고, 내가 옆에서 말을 해도 자신이 정말로 성인ADHD인지 믿지 않는 것 같았다.


요즘 진짜ADHD와 가짜ADHD 구별법, 심지어 패션ADHD라는 말도 생겨나지만,

진또배기는 하루만 같이 살아보면 의사가 아니더라도 알 수 있다.


참고로 남편은 과잉행동이 적은 조용한ADHD인 것으로 판단된다.



결혼 6년 차, 그 시간만큼 쌓인 에피소드를 묶으려다가 대신 그의 아주 평범한 하루를 기록해 봤다.


07:30 AM


아침에 그를 깨운다.

아이와 나는 7시에 일어났지만 늦게 잤다길래 잠을 더 재웠다.


쉽게 일어나지 못해서 발가락을 쉴 새 없이 꼼지락 거린다.

새벽까지 일을 하다 잤다고 한다. 당장 필요한 일이 아니라 나중을 위해

갑자기 '삘 받아서' 심리서적 번역을 했다는 것이다.


(남편은 심리상담사지 번역가가 아니다. 새벽 늦도록 원서로 공부를 했다는 게 아니고, 진짜 나중에 출판의 기회를 생각해 한국에 나오지 않은 책을 번역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왜? 그 시간에? 갑자기?)


그의 아침은 매번 늦다.


"우리 나가야 해 30분 남았어. 8시까지 가야 해."


그는 씻지도 않았고 나갈 준비를 전혀 하지 않은 상태다.

시간은 가고 있는데 여전히 발가락만 꼼지락 거린다.



07:40 AM


"20분 남았어"


침대에서 겨우 일어난 그는 주방으로 가서

별안간 떡국을 끓인다.


"약 먹으려는 거야? 시간 없으니까 그냥 밥 먹어."


"8시까지 가면 되는 거 아냐?"


"어 그러니까 시간이 없잖아. 아직 씻지도 않았잖아."


"응"


그는 떡국 끓이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아마도 하필 지금 이 시간에 떡국을 꼭 먹어야겠다고 다짐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 이 순간, 이 세계에는 남편과 떡국만이 남아있다.

아이랑 같이 나가는 날이라 아이 외출 준비를 하며 기다린다.

그 사이 떡국을 다 끓였다.


그리고 남편은 한갓지게 숟가락으로 국물을 떠먹으며, 이런 말들을 한다.


"떡국에 된장 넣으면 맛있는 거 알아?"


"(시계를 보며) 8시에 나가면 되는 거지?"



07:50 AM


"아니? 기차역에 8시까지 가는 거라고. 지금 나가야 된다고!! 몇 번을 말해?"

(사실 어제부터 몇 번 말했던 터라 나의 분노 게이지가 올라가고 있다)


"아, 그렇구나"


뜨거운 떡국을 입에 욱여넣고 세수를 하고 옷을 입는다.


"나 5분 만이잖아. 시간 맞출 수 있어. 나 몰라?"


이제 나가기만 하면 된다.


"음... 차키 어딨 지?"


"어제 자기가 썼잖아. 제자리에 좀 놓으라고"


IMG_7191.JPG ADHD남편은 차키를 제자리에 두는 것 대신 주먹보다 더 큰 키링을 두 개 다는 것을 선택했다.

이 차키가 보이시는가.

갤럭시 S23보다 두 배나 더 크다.

차키에는 주먹만 한 키링이 두 개나 달려있다.

그런데도 매번 여기저기에 놔두기 때문에

차키를 찾으러 온 집을 한 바퀴 순회해야 한다.



나는 포효하거나 미친년처럼 날뛰기 시작한다.



07:57 AM


여차저차 기차역에 무사히 도착했다. 기차역이 코앞이라 얼마나 다행인지.


남편은 나를 내려주며 내 노트북 가방을 들어주려고 한다.


"괜찮아, 안 무거워."


"아냐. 무거워. 줘."


"시간 없다고 괜찮다고."


"아니야, 괜찮아."


스위트함을 동반한 남편의 충동성으로 결국 나의 16인치 맥북은 바닥으로 수직 낙하했다.


tempImagevvhsYA.heic 더 시즌즈-악뮤의 오날오밤 '낙하'



멀쩡한 줄 알았던 맥북이 조금씩 맛이 가기 시작했다.

나의 16인치 맥북 낙하

나의 맥북 낙하

맥북 낙하

낙하


셋 하면 어디든 내가 뛰어내리고 싶어진다.


나의 모든 것,

맥북이 모서리로 땅에 곤두박질치자,

나는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 황급히 전원을 켰다.


그 위치에서 그 각도로 떨어졌음에도 액정이 멀쩡하다. 뭐라도 고장이 났다면 그 즉시 내 무게로 남편을 눌러버렸을 텐데....


언제나 신은 그의 편이다.


말없이 노려보기만 하다 헛웃음이 난다. 그가 옷을 앞뒤 거꾸로 입고 있다.

이건 365일 중 360번 반복되는 일이라 난 갑자기 어떤 무력함을 느낀 채 황급히 기차역으로 뛰어들어갔다.


이건 우리의 평범한 하루, 단 1시간 아니 30분 간의 기록이다.


ADHD 핵심 특성

집행 기능 지연 : 기상·세면·외출 준비 시작 시점이 계획보다 늦어질 때가 있음

충동적 행동 경향 : 갑작스러운 떡국 끓이기, 노트북 가방 들기 → 낙하

예상 소요 시간 과소평가 : 도착 시각이 임박해도 “아직 여유”로 인식해 일정이 촉박해질 수 있음

고강도 집중 구간(하이퍼포커스) : 흥미로운 작업에 몰입하면 장시간 이어짐 -> 새벽에 번역 일 몰입

조직화 어려움 : 차 키·서류 등을 “눈에 띄는 곳”에 두지만, 다음 날엔 찾느라 시간 소모

주의력 결핍 : 옷 거꾸로 입기


여기서 대단히 당황스럽고 조금 무섭기도 한 사실은,

그가 마흔두 살이 되도록,

나를 만나 결혼하기 전까지,

스스로 ADHD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다음 연재글은 남편이 직접 ADHD에 관해 고백하는 글을 실을 예정입니다.


**이 글은 ADHD에 대해서 나쁘게 이야기하려고 쓴 글이 아니라 그런 남편도 이해하고 싶지만 매번 화가 나는 저의 어려움도 토로하고 싶어 쓴 글입니다.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에 대한 과정은 3부에 실을 예정입니다.


**대문 이미지 출처: 아는 형님 JTBC 250315

keyword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