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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유산

by 이손끝
엄마는 서른아홉에 가진
셋째 아이를 6주 만에 잃었다.
이듬해 엄마는 이혼했다.
나는 마흔에 가진 둘째 아이를
9주 만에 잃었다.


지난해 4월 아이를 보내고 집으로 오던 길. 내가 사랑해 마지않던 흐드러진 벚꽃길을 지나오며 흩날리는 꽃잎마다 마음이 베였다. 남편이 끓여준 미역국을 먹고, 침대에 모로 누워 울다 잠들기를 반복하던 그 며칠, 아니 일주일이 지나도록 엄마는 전화 한 통 없었다.


“아니 엄마라는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어?”


그렇게 2주 정도가 지난 어느 날. 엄마와 다른 일로 통화하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길래, 참다못한 말들이 터져 나왔다.


“엄마는 어쩜 위로 한마디를 안 해.”


“그게 누가 위로해서 될 일이냐.” 그녀가 되려 물었다.


그래도 엄마라면 한 마디 정도는 해야 된다고 악악거렸다. 애원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 같다.


전화를 끊기 전 마지못한 엄마의 한 마디.


“잘 먹고 잘 살아.”




씨부럴.




열네 살, 우연히 엄마의 유산 소식을 듣게 됐다. 주방 옆 문이 열린 작은 방에 내가 있다는 걸 몰랐던 엄마가 친구와 통화하는 걸 들었기 때문이다. 하도 아들아들해서 뒤늦게 임신을 했는데 6주 만에 유산이 된 것이었다.


오랫동안 아빠는 아들을 염원했다. 딸들 운동화를 죄다 검은색, 파란색을 사 온다거나, 공원에 놀러 가면 남자아이들과 축구를 한다거나. 속이 참 투명한 사람이어서 크는 동안 나는 속이 더부룩한 적이 많았더랬다.


아빠는 엄마가 일부러 아이를 지운 것이라고 했고, 엄마를 끝도 없이 괴롭혔다. 내가 그 통화를 듣지 못했다면 '진짜로 엄마가 (아빠 몰래) 수술을 한 건가?' 싶을 정도로 아빠는 악착같이 엄마를 몰아붙였다. 진실은 중요하지 않았고 아빠 자신의 생각을 믿어버리기로 작정했던 듯하다.


어쨌든 엄마의 유산은 우리 가족을 뒤흔들었다. 아니지, 아빠를 세차게 흔들어댔다. 이후로 아빠는 한동안 잠자는 우리를 매일 깨웠다. “엄마가 아빠 몰래 아이를 지웠어. 엄마랑 헤어지기로 했다. 너희는 누구랑 살래” 같은 저열한 질문 따위를 새벽 2시에 지껄이다가 결국 이혼당했다.





“아이가 심장이 뛰지 않네요” 둘째를 품은 지 9주 만의 일이었다.


하필 임신을 알게 된 날이 이삿날이었다. 막연하게 괜찮을 거라 생각하며 무리를 한 탓이다.

첫째를 낳고 빼지 못한, 아니 오히려 더 살이 쪄버린 내 몸 탓이다.

힘들다고 첫째를 맡기러 친정에 너무 왔다갔다한 탓이다.

엽산을 너무 늦게 먹은 탓이다.

내가 늙은 탓이다.

내가 둘째를 가졌다는 사실을 ‘진짜로’ 믿지 않은 탓이다.


그냥 전부 내 탓이었다. 남편은 그런 나를 나무랐다. 누구의 탓도 아니라고 나의 탓은 더더욱 아니라고. 누구든 붙잡고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제 자연적으로 아이를 갖기 힘들다고까지 하니 모든 게 내 탓이 아닐 리 없었다.

처음 만난 사람조차 내 등을 쓸어주고, 따뜻한 손을 내어주는데 나를 낳은 엄마가 나를 모른 척하는 게 못 견디게 클클했다.


지난해 벚꽃들을 지나
올해의 4월이 다 가도록
나는 벚꽃을 탓하고, 엄마도 탓했다.
누구라도 탓해야,
모두가 웃는 얼굴이 되는
이 눈부신 봄의 절기들을
겨우 지나칠 수 있었다.

IMG_6052 2.HEIC 벚꽃만 보면 마음이 아프다고 했더니, 남편이 왜 아프냐고 한다. 아이가 꼭 엄마아빠한테 인사하러 오는 것 같아 기분이 좋다며.






남편의 눈동자를 기억한다.


수술 중에 마취에서 깼다. 후처치 중이라 아프거나 하지 않았지만 차가운 금속성의 도구가 나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수술실은 너무 차가웠고 너무 밝았다.

“선, 선생님...”
“네 다 끝났어요. 일어날 수 있겠어요?”


휠체어에 앉아 수술실 밖으로 나왔다. 남편은 넘어질 듯 옆으로 약간 기울인 채 멍하니 서 있었다.

같이 살면서 본 적 없는 눈빛으로 나를 보자마자 참았던 숨을 "후-"하고 내뱉었다.


10년 간 치매였던 외할머니에게서 보던 그 눈빛이다. 알고 있던 모든 것이 사라진 세계에서 그녀는 눈빛조차 갈 곳을 잃었다. 그러다 아주 드물게 기억이 돌아와 당신 앞에 있는 사람이 딸이라는 걸 알아차린 순간, 더 없이 선명해지던 그 검은 눈동자. 곧 사라질 기억에 무엇이든 붙잡으려 세차게 흔들리던 그 눈동자 말이다.


그는 아이를 잃은 부모의 얼굴이 아니라 나를 잃었다가 겨우 되찾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정말 너무 무서웠어. 네가 잘못될까봐."


"나 어디 죽으러 갔다왔어?"라고 답했지만, 나는 여태 그 눈빛에 위로받는다.






아이의 부채질을 기억한다.


아기가 왜 왔다 갔냐는 물음에, 어디로 갔냐는 물음에 또 언제 오냐는 아이의 물음에.

“엄마는 너랑 즐겁게 놀고 있으면 돼. 아가가 다시 올지 안 올지는 잘 모르겠어.”

혼잣말인듯 꺼내놓다가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아 고개를 돌렸다.

아이가 방으로 달려 들어갔다.

부채를 들고 와 얼굴에 부채질을 해주었다. 말없이. 오랫동안.


나는 여태 그 부채질에 눈물을 말릴 수 있다.





그러다가 작년부터 매일 아버지의 얼굴을 보게 되면서 마음속 깊이 묻어둔 그 기억들이 온전히 다시 떠올랐는데, 하지만 이상하기도 하지, 이제 영범은 그 시절 아버지의 마음을, 그 마음의 환하고 흐린 굴곡을, 모나고 둥근 모서리를, 그리고 이제는 보이지 않는 이면까지도 어쩐지 다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김연수, 「우는 시늉을 하네」, 『사월의 미, 칠월의 솔』, p.28


위로받은 적 없는 사람은 위로할 수 없다. 엄마가 아이를 잃었을 때 누구에게든 충분히 위로를 받았을까.

등을 쓸어주고 말없이 안아주는 사람이 없었어서, 아이를 잃는다는 것은 그 누가 위로를 해도 처참할 뿐이라고 생각하게 된 걸까.

그때의 나도 아이를 잃은 엄마를 위로한 적이 없는 것 같다. 내가 듣고 있다는 것을 엄마에게 들키지 않게 슬며시 방문을 닫았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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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한 4월 지나 숲의 그늘이 짙어지는 이 6월의 문턱에서 나는 그때 엄마의 사정을, 심정을 조금이나마 알게 된다. 글을 쓰다 보니 엄마가 지나쳐왔을 장면들이 조금씩 선명해진다. 어쩐지 오늘은 다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그녀가 그때 받았으면 좋았을 위로를 혼잣말로 중얼거려 본다.



지금의 나보다도 어린 서른아홉 살의 엄마가
여태 그 자리에서 누군가의 눈빛을,
부채질을 기다리고 있지는 않나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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