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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고백이 줄줄이 비엔나라면, 나의 고백은 킬바사다

by 이손끝

우리는 만나자마자 서로를 알아봤다.

서른여섯, 마흔둘.

시간이 없었다. 사회에서 정한 과년한 나이가 되어서가 아니라 빨리 같이 살고 싶은 마음에.

시간이 영 없었다. 그가 집에 들어갈 시간이.

그래서 만난 지 두세 번 만에 서로가 가진 패를 빨리 까는 게 상책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남자의 고백은 줄줄이 비엔나소시지 같았다. 잔잔한 고백이 이어졌달까.

이런 식이었다.


남자:

“사실 나 이혼했어요.”


여자:

“응, 우리 엄마도 이혼했어요.”



남자:

“나 실은 500만 원 밖에 없어요.”


여자:

“응, 나 돈 있어요.”



남자:

“우리 부모님 임대아파트 살아요. 다른 사람한테는 부끄러워 말 못 했는데, 말할 용기가 생겼어요. ”


여자:

“난 아빠가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 몰라요. 괜찮겠어요?”



남자:

“난 차도 없어요.”


여자:

“우리 집에 주차장이 없어요.”



남자의 고백이 정말 아무렇지 않았냐고? 그럴 리가!

당시 전화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이혼했다는 말에 거의 쓰러질 뻔했다.

이혼? 머리에 순간 피가 통하지 않는 느낌이었다. 혹시라도 머리가 바닥에 떨어져 깨질까 봐 핸드폰을 든 채 침대 위로 몸을 날렸다. 이혼 가정에서 자랐기에 그게 대단히 큰 충격일리는 없었다.

다만 정말 좋은 사람이었는데 이혼했고 아이가 있다는 말에 내가 지레 겁먹고 줄행랑을 친 경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내 생일선물로 벽돌보다 무겁고 거대한 이희승 박사의 대국어사전을 준 사람이다. 대국어사전을 선물하는 인간이란 으레 좋은 사람이어야 마땅하다. 그 사전은 여태 내 보물 1호다.


여하튼 잠시 좋지 않은 결말을 그려본 탓에 머리가 어질했다. 역시 괜찮은 남자가 마흔이 넘어 혼자일 때는 이유가 있는 거였나?




하지만 나에게 더 큰 필패의 카드가 있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밖에. 지금 이 관계에서는 내가 지는 게임이었다. 왜냐면 나는 만나는 순간부터 이 남자와 결혼하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었다.


남편의 줄줄이 비엔나소시지 같이 하찮은 고백들을 한편에 치우고 나의 킬바사를 꺼내보였다.

비엔나킬바사 사이즈 수정 복사.jpg 하찮은 비엔나소시지 같으니라고, 나의 킬바사를 보아라. 어마어마하지 않느냐! / 출처: FREEPIK


나는 시각장애인이다.
스물일곱 살에 한쪽 눈을 잃었다.

고도근시로 인한 망막 열공 박리로 응급 수술을 받았지만 이미 몇 년에 걸쳐 망막이 4분의 3이 떨어져 나간 상태였다. 망막은 한번 손상되면 재생되지 않는 신경세포이니 이 상태로 죽을 때까지 살아야 하는 것이다. 어디서 구해 갖다 붙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재수술 혹은 예기치 않은 사고로 다른 쪽 눈도 다친다면 전맹이 될 수도 있는 거였다.


그와 나의 고백은 체급부터 달랐다.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그가 어떻게 반응해도 수긍하리라. 가겠다면 보내주리라. 되뇌며 말을 꺼냈다.


여자:

“나 실은 한쪽 눈이 안 보여. 망막 수술을 받았거든. 회복 가능성 이런 거 없어. 그냥 안 보이는 거야. 장애 등록은 안헀지만 장애인이야.”


남자:

“응 그게 왜?”


0.1초의 머뭇거림 없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그 말에 나는 울었다. 꺽꺽대는 나를 말없이 무릎에 앉히고는 한참이나 등을 쓸어주었다. 그가 잘 보이기 위해 괜찮은 척한 게 아님을 나는 알았다.

내가 나임을 고백할 때에 상대가 지어 보이던 표정, 시간의 단차, 번지르르한 말들을 이미 여러 차례 경험했던 바, 그가 뱉은 말에는 어떤 불순물도 섞이지 않았다는 걸 나는 알 수 있었다.


그가 가난한 것도 이혼한 것도, 내가 장애인인 것도 이밖에 다른 소시지들도 하찮기 그지없었다.

그가 지금 돈이 없다는 말이 그가 성실하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었으므로. 그의 부모가 여유롭지 않은 것이 그의 탓이 아니었으므로. 그런 상황적 조건들은 내가 이 사람과 결혼할 수 없는 이유가 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나의 장애 또한 현재까지는 일상생활의 불편함 정도이니 이런 조건들이 결혼 생활에 미친 영향이 '아직까지는' 0에 수렴한다고 볼 수 있겠다.



결혼은 우리의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우리 결혼 생활의 최대 난관은
정말이지 엉뚱한 곳에서 쓰나미급으로 들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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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