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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유골함

"우리는 늘 어린 시절 겪었던 모든 불행을 건드릴 사람과 결혼하게 된다"

by 이손끝
아빠는 뜨거웠다.


화장장은 몹시 붐볐다. 화장하기까지 오래 기다려야 했다.

분골 후에 바로 담긴 탓일까. 아빠의 유골함은 뜨겁다 못해 손이 데일 지경이었다. 유골함을 받치고 있는 손가락이 피아노 치듯 분주히 움직였다. 게다가 생각보다 너무 무거웠다.

화장장에서 나와 봉안당까지 5분 남짓. 가파른 언덕을 내려가는데 걸음을 옮기는 내내 예를 갖추기는커녕 '뜨겁다. 뜨겁다. 보는 눈만 없다면 실수인 척 떨어뜨려 버리고 싶다'라는 생각 따위를 해버리고 말았다.





아빠가 요양병원에 있다는 소식은 구청에서 전해왔다. 곧 임종을 맞이할 것이기에 연락했다고. 그리고 장례 절차를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

언니나 나, 아무도 그의 마지막 순간을 지켜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며칠 뒤,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고서야 언니와 나는 5시간 거리에 있던 그곳, 스무 살이 돼서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던 그곳에 내려가게 됐다.


장례 후 아버지 집을 정리하면서. 계량기의 숫자가 꽤 오래 집을 비웠음을 말해주었다.


서로가 뭐 하고 사는지 어떻게 사는지도 모른 채, 17년 만이었다.


그는 내 앞에 나타날 수 없었다.

나와 살았던 그 마지막 2년 때문에, 창피해서라도.


그는 언니 앞에 나타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녀 이름 앞으로 돈을 많이도 해 먹어서 신용불량자로 만들었으니.


그는 차마 엄마 앞에 나타날 수 없었다.

엄마는 꿈에서라도 아빠라면 치를 떨었기 때문에.



16살, 엄마가 이혼을 하고 서울로 갔다. 언니도 곧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대학을 갔다.

나는 전학을 갈 수 없었고, 아빠와 가장 오래 산 사람이 됐다.

언니가 떠난 직후 2년간 나는 아빠가 무너지는 과정을 실시간으로 목격했다.


그 과정은 신속했고 군더더기가 없었다.
한 사람의 인생이라는 게,
파도에 휩쓸린 모래성처럼 흔적도 없이 무너질 수 있다는 걸
이른 나이에 알게 됐다.

나는 모래성 옆에 바로 서 있었기에
모든 것이 사라진 이후에도
내게는 불안이라는 모래들이 달라붙어 사는 내내 서걱거렸다.



엄마 시점의 아빠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한다.

부부라는 것은 오로지 둘만의 세계이므로 하다못해 같은 공간에 살았더래도 절대 알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에. 드문드문이래도 어린 시절 아빠는 종종 따뜻했으니, 엄마에게 들은 말 뿐으로 내가 그를 넨장맞을 놈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다만, 엄마와 언니가 떠나고 아빠와 살았던 2년 간의 이야기는 조금 하고 싶다. 설사 내 기억이 조금 어긋났다 한들 아빠는 죽어서 항변할 수 없고, 엄마나 언니에게는 상처가 될까 여전히 하지 못했던 이야기이므로.

성인이 된 후에 상담을 오래 받았는데도 이따금 그 시절로 돌아가고야 말기에.


2년 동안 아빠와 같이 사는 사람이 두 번 바뀌었다. 한 명은 무뚝뚝했고 한 명은 친근했으며, 한 명은 지인이었다 했고 한 명은 술집여자였다. 한 명은 6개월만 살다 나갔고, 한 명은 도무지 같이 살았던 기간이 생각이 나지 않지만 애쓰지 않아도 떠오르는 기억이 많다.

새벽 6시에 등교하는 나의 아침밥이 그들에겐 과업이었을 거다. 한 명은 아침밥을 주면서도 인사 한마디 건네지 않았고, 한 명은 그 새벽에 국까지 끓여놓고는 내가 밥을 먹는 사이, 자는 아빠를 끌고 나와 학교에 데려다주라고 떠밀었다.

한 명은 할 말도 하지 않았기에 어느 날 사라졌고, 한 명은 지는 성격이 아니었기에 급기야 아빠는 그녀를 패기 시작했다. 엄마한테는 그런 적이 없었기에 나는 오히려 기가 찼다. '하다 하다 여자를 패는 인간이 되어버리다니'. 그녀는 맞고만 있지 않았고 나는 그녀 편에서 악다구니를 같이 쓰기도 했다.


https://youtube.com/shorts/P_9VBBcb3Rk?si=lZVA2djOs1XE2HEN

영화 ‘세 자매’ 장윤주가 연기한 막내 미옥을 보고는 그녀가 떠올랐다.

그즈음 아빠는 술을 매일 마셨다. 한때 축구선수였던 탓에, 배운 것이 발차기라고, 현관문이고 뭐고 발로 뻥뻥 차고 다녔다. 꾸렸던 회사는 망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럼에도 허울뿐인 고급 세단과 골프백, 브랜드 옷들은 항상 함께였으니 사람들은 그에게 뭔가 한방이 있는 줄 알았을 거다.

급기야 아빠는 뭔가를 들고 다니며 다 같이 죽자고 협박을 했는데, 여자는 그걸 권총이라 했지만 난 믿지 않았다. 안방에서 투닥투닥 소리가 날 때면 여자는 (권총이라 생각되는) 물건을 들고 뛰쳐나와 황급히 베란다 화분 밑에 숨기곤 했다.


협박은 무용했다.

스스로 죽을 용기도, 남을 죽일 용기도 아빠에게는 없음을 나는 진작에 알았기 때문이다.


어느 여름인지 가을인지 여자는 집을 나가며 이렇게 말했다. "네 엄마가 왜 아빠를 떠났는지 알겠어."


집에 누가 없어도 상관없었다.

여자가 나간 이후 나도 집을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아파트를 팔아 아빠는 원룸으로 갔고, 나는 수능을 100일 남겨놓고 친구 집에 얹혀살았다. 그 집은 우리 집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새벽 내내 접시가 날아다녔다.




죽을 용기도, 죽일 용기도 없던 그 남자는 어찌어찌 살다가 결국 척추암이라는 병에 걸려 생을 마감했다.

17년 만에 관 속에서 우리를 맞이한 아빠는 전혀 알아볼 수 없는 타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아빠 얼굴에 이렇게나 큰 점이 있었다고?). 우리는 절차상 예의를 차리는 정도로만 장례를 치렀다. 그래서 유골함이 더 뜨거웠던 것인지도. 제일 저렴한 도자기 유골함은 뼛가루를 태운 그 온도를 감당하지 못했다.





나는 아빠와 전혀 다른 사람과 결혼했다. 나는 그 사실에 매우 안도했고 심지어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아빠는 종종 남편과 나 사이에 나타났고 자주 훼방을 놨다. 남편은 "난 당신 아버지가 아니야. 난 절대 그렇게 하지 않아. 그러니 날 너무 몰아세우지 마"라고 말한 적도 있다.



"You always marry somebody that's going to trigger for you every unhappiness that you ever had in your childhood."

우리는 늘 어린 시절에 겪었던 모든 불행을 건드릴 사람과 결혼하게 된다.
_가보 마테 (Gabor Mate)


가보 마테 박사의 아래 영상을 보게 된 후, 그러니까 내가 이혼을 실패하기로 결심하자마자 내 알고리즘에 뜬 이 영상을 접한 뒤 나의 무의식적인 정서 패턴에 대해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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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유튜브 <We Need To Talk>, 〈Gabor Mate: Your Partner Choice Reveals Everything! The Hidden Cost of Ignoring Trauma〉, 2024.10.22.



"누군가와 관계를 맺게 될 때는 두 가지 차원에서 그 일이 벌어집니다. 하나는 겉으로 보이는 부분으로, 그 사람이 매력적이고, 유머가 있고, 함께 있으면 즐겁다는 점이죠.


그런데 그 기저에는, 어릴 적에 받지 못했던 사랑을 되찾으려는 무의식적인 욕구가 자리하고 있어요.


예를 들어, 어릴 때 학대를 받은 여성들이 왜 반복적으로 학대적인 남성과 관계를 맺게 될까요? 사람들은 ‘도대체 그 여자들에게 뭐가 문제지?’라고 생각하겠죠. 아니요. 그들에겐 아무 문제가 없어요.


진짜 문제는, 그들이 어린 시절 가장 원했던 사랑이 바로 그 학대적인 사람의 사랑이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그런 성향을 가진 남성에게 끌리게 되는 거죠.


그러니 관계란 결국 서로 함께 성장할 수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그게 가능하다면요.

하지만 제가 장담컨대,

결혼을 하게 되면 그 사람 안에서 당신의 꿈과 최악의 악몽이 함께 나타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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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를 떠올리며 여러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해보기로 한다. 나를 위해서. 그리고 남편을 위해서. 이 관계에서 노력이란 노력은 다 해보겠다 다짐하면서.


Q. 남편은 어떤 부분에서 아빠와 다른 사람일까? 이들 관계에서 공통된 나의 역할은?

Q. 나는 어떨 때 남편을 통해 아빠를 보는가?

Q. 어렸을 때 아버지에게 받지 못한 어떤 것을 남편에게 받으려고 한 건 아닐까

Q. 이 관계에서 나는 무엇을 배우고 치유할 수 있을까?

Q. 우리가 결국 서로 함께 성장할 수 있기 위해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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