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5 기록하려다 무너졌다

지금의 감정을 먼저 쓰기로 했다

by 여전히

여러 사건을 겪으면서 나는 이렇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기록하고 싶었다.

사건이 일어난 순으로 단순 감정만 나열할 때는 뚝딱 내용이 나왔는데, 이 사건을 겪었을 때 마음이 이랬고 이런 활동을 했고 이런 것을 했다고 글을 쓰는데 눈앞에 안 보이던 것이 눈앞에 보이니까 감정들이 상기되고 또 생각나고 '침울'해졌다.


우울보다 더 심해진 말, 그대로 걱정과 근심으로 우울해졌다. '침울'해진 감정으로 나는 글을 쓰려고 한 달 가까이 시도했다. 쓸 때마다 내 감정을 바뀌었고 뒤죽박죽 써 내려갔지만 마음을 담아내지 못했다. 그래서 그때의 감정보다 지금 감정을 먼저 쓰자고 생각했다. 기록하고 싶은 것을 쓰자.

내가 작가가 되고 싶은 것도 아니고 책을 내고 싶은 것도 아니니 뭘 쓰던지 내 마음대로 가능하니까.


요즘 내가 겪고 있는 것은 괴리감이라는 감정이 크다.

내가 알고 있는 것으로 판단하는 것은 부분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캄캄한 어둠 속에 사과를 하나 두고 조명으로 한 부분만 비춘다. 그 부분이 상한 부분일 수도 있고 싱싱한 부분일 수도 있다. 나는 영원히 밝은 조명에서 사과를 보지 못한다. 나는 이 사과가 싱싱한 사과인지, 상한 사과인지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는가.

내가 판단하는 모든 것은 이 부분과 동일하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하니 남에 대해 평가하지 못할뿐더러 모든 것에 대한 판단을 잃어버린 것 같다.


원래부터 토론이 어려운 사람이었는데 주체적인 판단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글 쓰는 것도 주저하는 것 아닐까 생각한다. 내가 겪어온 일들은 더 큰일을 겪은 사람들이 보기엔 팔자 좋은 짓일 수도 있고 현실을 모른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맨 처음에는 내가 당사자가 되어서 나와 같은 경험을 한 사람을 찾기 위해 검색창에 매달리던 내가 생각이 나서 글을 써보자 했었는데 점점 이리저리 무너지는 걸 보니 내 인생이 그렇지 하는 자기혐오도 생겨나고 무의미한 시간들을 보내고 있구나. 꼬리에 꼬리에 생각은 끝말잇기를 한다. 그래서 힘들다.


요새 드는 생각이 어떤 비하나 그런 건 아니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경험에 비유해서 생각해 보자면, 다들 고등학교에 진학해서 대학교를 준비하고 있는데, 나는 고등학교에 중퇴를 한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내 인생에 목표를 가지고 자의적으로 중퇴를 한 것도 아니고 타인에 의해서 중퇴를 해서 억울하기도 하고 막막한 기분이라는 것이다. 이 애매한 기분을 비유할 경험이 이런 기분이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결론은 그냥 써보자고 생각했다. 잘 써보려고 노력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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