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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ghee Jul 18. 2016

사랑의 기원

반복되는 '오독'에 대하여

나 말고도 아마 많은 사람들이 헤드윅의 OST 'The Origin of love'을 좋아할 것입니다. 이 노래가 더욱 매력적인 것은 바로 이 노래 속 이야기가 모두를 잡아 당기기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하는데요. 그 이야기는 바로 플라톤의 <향연> 중 아리스토파네스가 ‘사랑의 기원’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부분입니다.


두 짝의 등이 붙어 있고, 네 팔과 네 다리 그리고 두 얼굴. 이 기괴한 모습이 인간의 진짜 모습이었고 이런 무시 

무시한 인간의 잠재력에 불안을 느낌 신은 번갯불로 등짝을 갈라  놓는다. 이후 인간은 원래의 모습을 찾으려 영원한 여정을 떠나고 아직까지 우리는 잃어버린 등짝을 찾기 위해 사랑의 시행착오를 반복하고 있지요. 


과연 찾을 수 있을까요? 우리는 얼마나 더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할까요? 고민의 끝에서 다시 물음표가 생겼습니다. 대체 왜 인간은 사랑에 대한 이런 이야기를 만들었을까? 다른 의미에서 ‘사랑의 기원’을 고민했습니다.


영화 ‘곡성’을 꽤 인상 깊게 봤습니다. 수동적이기만 하던 종구는 자신의 딸에게 일이 터지자 어떻게든 그 일들을 해결하려 고군분투합니다. 그렇게 적극적으로 바뀐 종구이지만 정작 딸에게 일어난 사건의 이유를 전혀 모릅니다. 일광은 그것을 ‘낚시와 미끼’로 설명하죠. 영화 말미에서도 종구는 무명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합니다. 무명은 그것을 ‘의심’으로 설명합니다. 분명 모두가 사건에 대한 설명을 종구에게 했지만 종구는 여전히 납득할 수 없습니다. 이런 종구는 바로 우리 모두의 모습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그냥 두지 못합니다. 인간은 어떻게든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을 이해하려 합니다. 번개를 이해할 수 없어 제우스를 만들었고, 엄청난 파도 앞에서의 두려움과 무지는 포세이돈을 만들었습니다. 죽음을 이해하고 싶어 하데스를 만들었고, 사랑을 설명할 수 없어 에로스를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설명되는’ 이 아이러니가 인간의 본질이지 않을까요.


아리스토파네스가 사랑의 기원을 이야기한 것은 그가 사랑을 알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사랑을 ‘모르기 때문에’,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사랑을 이해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랑은 @@@이다’라는 명제를 만드는 우스운 상황을 만듭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또 설명하고, 나아갈 것입니다. 그게 인간이니까요. ‘자유’라는 형벌 때문에 우리는 무엇을 알기도 전에, 무엇을 이해하기도 전에 (시간이 지나도 이해할 수 있을까요?) 먼저 발을 딛어야 하는 존재이니까요. 등짝이 찢어지는 아픔의 이유를 찾고 또 다시 우연적 사랑에서 운명적 이유를 찾을 것입니다. 


순간 순간이 고군분투입니다. 단지 바라는 것은 ‘사랑의 기원’을 설명하기 보다는 다음의 사랑에는 전 보단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바람뿐입니다.  


www.instagram.com/twopa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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