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하 작가의 [퀴즈쇼]를 읽고
[고통도 뱃살처럼 관리해야 하는 세대]
대한민국 스무살 청춘은 아프다고 말할 수 없다. 모두가 아픈걸 알고 있지만 아프다 ‘말’ 할 수는 없다, 고통도 관리해야 한다. 고통을 드러내는 것은 뱃살을 드러내 보이는 것과 같이 부끄러운 일이다. 감추어야 한다. 고통은 부끄러우니까. 성공을 강요하는 시대에 나는 루져라고 시인하는 꼴이니까. 고통 때문에 의기소침한 모습을, 고통에 두손 두발 든 모습을 사람들은 싫어한다. 그래서 고통을 보이는 것은 수치이다. 뱃살의 셀룰라이트를 제거하듯 고통의 셀룰라이트는 ‘긍정’이라는 처방을 통해 제거한다.
고통은 ‘힐링’으로 감추고, 아픔은 ‘청춘’으로 덮는다. 기필코 긍정의 힘으로 감춰야 한다. 어디에든 힐링이 넘쳐난다. 아프다 말하는 사람은 없는데 힐링 받았다는 사람은 넘쳐난다. 왜 고통은 소리내어 이야기하지 않고 모두 힐링만을 치유만을 이야기할까. 힐링에 대한 강박증. 어느 시대보다 청년들이 힘이 든 시대, 하지만 페북과 트위터에서의 청년들은 모두가 행복하며 모두가 치유받았으며, 모두가 긍정이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들은 정말 치유를 받았을까?
현실을 보면 우리는 어렵지 않게 알아 차린다. 모두가 고통을 숨기지만 그 그림자는 감출 수 없음을. 자정의 그림자처럼 긴 고통의 그림자들. 긴 단군 이래 가장 많이 공부한 세대. 모두가 대학을 나오고 토익점수는 세계 최강에 액션영화 정도는 자막없이 볼 수 있는 정도에 윗 세대보다 월등히 높은 독서량. 그런데 그에 반이 백수,백조다. 대체 무얼 잘못했길래?
고군분투의 고통을 감추고 우리는 연애에서, 여행에서, 친구와의 수다에서 치유받는다. 그런데 이렇게 받는 힐링이 과연 고군분투의 고통을 덜어내줄까? 잠깐은 그럴 수 있다 생각하지만 고통의 뿌리는 없앨 수 없다. 우리는 과잉긍정시대에 살고 있다. 꿈이라는 달콤한 말로 청춘들은 희망이라는 개미지옥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꿈을 위해서 청춘자체를 어쩌면 착취하고 있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우리는 서 있다.
과잉긍정시대가 말하는 긍정말고! 희망을 품은 혼돈 속의 생활 말고 진짜 삶을 긍정하는 태도는 어떻게 나올까? 나는 부정이 없이는 긍정도 없다고 생각한다. 부정만이 긍정으로 가는 길이다. 여기서의 부정은 비관이 아닌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대한 ‘비판’의 다름 아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에서 풍기는 낙관주의적인 냄새를 맡아보자. 자신의 환경을 응시하지 못하고, 그래서 내가 ‘왜’ 아픈지도 모르는데, 원래 청춘은 아픈거라며 위로하는 그 낙관이 너무 싫었다. 자신을 응시해야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이 보이고 그래야지 나를 비판하든 환경을 비판하든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비판 후에 오는 통찰, ‘그래서 나는 그럼 어떻게 해야하지?’라는 의문을 가질 때 거기서 진정한 긍정이 태어난다 생각한다. 내가 왜 아픈지 알고, 어느 세대 보다 열심히 살고 있는 데 되는 것은 하나 없는 이유를 알게 되었을 때만이 그 고통을 면전에서 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고통을 뱃살 감추듯 숨길 필요가 없다. 오히려 모두가 아프다고 모두의 고통을 밖으로 보여야 한다. 그래서 서로가 왜 아픈지를 보며 서로 아파해야 한다. 그리고 몇가지 고통의 이유는 그들의 문제 때문이 아님을 알게 된다면 진정한 ‘긍정’을 모두가 맛보지 않을까? ‘괜찮아, 간절히 원하면 이뤄질 거야’가 아닌 ‘너의 삶을 진짜로 봐!’ 라 말 할 때이다.
판도라의 이야기를 잘 알 것이다. 그녀의 상자에서 미움, 슬픔, 죽음 온갖 재앙들이 나온 후 마지막 희망이 나오는 것을 보며 인간은 희망을 잃고 살지 말아야 한다는 해피엔딩의 그 이야기.그런데 희망을 온갖 재앙의 끝판왕으로 보면 안될까? 실패한 인생에 ‘잘 될 거야’라는 희망으로 그 실패를 돌아보지 못하게 한다. 희망은 스스로를 변명하게 만든다.
어쩌면 희망은 인민의 아편이다. 이 아름다운 재앙 속에서 우리는 진짜를 보자.
*3,4년 전 김영하 작가의 [퀴즈쇼]를 읽고 쓴 글을 조금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