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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 : 에피쿠로스

친구는 누구인가?

친구들의 도움이 우리를 돕는 것이 아니라 ‘친구들이 도와줄 것이다’라는 믿음이 우리를 돕는다.「단장」 에피쿠로스 


 세상살이 참 각박합니다. 대출금을 갚아야 하고, 그 대출금을 갚기 위해 직장에서 끊임없이 경쟁하고 눈치봐야합니다. 턱 없이 부족한 월급 통장을 보며 다른 돈벌이가 없나 끝없이 기웃거려야 합니다. 이런 각박한 세상살이에 지칠 때면 우리는 친구를 찾습니다. 경쟁하지 않아도 되고, 눈치 보지 않아도 되는 마음 편한 친구를 만나 잠시 쉬고 싶은 것이지요. 그런데 혹시 그런 친구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마음 한 구석이 헛헛해지는 기분을 느낀 적이 없나요?      


 친구를 만나서 이런저런 옛날이야기에 웃고 떠들 때는 좋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알 수 없는 공허감을 느끼곤 합니다. 그 공허감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친구가 지금 내 문제를 해결해줄 수는 없잖아.” 바로 이것입니다. 친구는 각박한 세상살이를 잠시 잊게 해줄 수 있을 뿐, 우리네 삶의 구체적인 문제(대출‧생활비‧재테크‧직장‧경쟁‧눈치…)를 도와줄 수는 없습니다. 


 흔한 친구는 마치 술과 같은 존재입니다. 괴로운 하지만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에 시달릴 때 진탕 술을 마시는 이들이 있죠. 술을 마셔 자신의 문제를 잠시 잊어보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술이 깨면 어떨까요? 문제가 해결되기는커녕 더 소모적인 방식으로 그 문제를 악화시켰다는 생각 때문에 더욱 불쾌하고 우울한 기분에 시달리게 되지요. 



 흔한 친구와의 만남 역시 이런 양상을 반복하게 되는 경우가 흔합니다. 어쩌면 그래서 친구를 만날 때면 술을 마시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친구와 술은 우리네 삶에서 같은 기능을 하게 될 때가 있으니까요.  이런 술과 같은 친구는 진정한 친구라고 말할 없습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친구는 어떤 친구일까요? 


 ‘회피’가 아니라 ‘도움’을 주는 친구입니다. 즉, 우리가 당면한 삶의 구체적인 문제에 ‘도움’을 줄 수 있어야 진정한 친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친구와의 관계를 우정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조심해야 할 대목이 또 하나 있습니다. ‘도움’은 ‘우정’이 아니라 ‘의존’으로 변질될 가능성을 늘 품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볼까요? 대출금에 시달릴 때 친구가 대출을 갚아주고, 생활비가 부족할 때 친구가 생활비를 보태주었다고 해봅시다. 그 친구를 대하는 마음이 ‘우정’이 될까요? ‘의존’이 될까요? 아마 십중팔구 ‘의존’하게 될 겁니다. 힘들 때 받는 반복적인 도움은 ‘의존’이 될 개연성이 아주 높으니까요. 이제 우리는 답답한 마음이 듭니다. 우정은 우리네 삶의 구체적인 문제에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도움은 ‘의존’의 마음을 야기해 다시 우정을 파괴합니다. 



 이 우정의 난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우정=도움’입니다. 그 ‘도움’은 ‘회피’와 ‘의존’ 사이에 존재합니다. 그 ‘우정’의 도움은 어떤 것일까요? 이에 대해 에피쿠로스는 이렇게 답합니다. “친구들의 도움이 우리를 돕는 것이 아니라 ‘친구들이 도와줄 것이다’라는 믿음이 우리를 돕는다.” 이는 어떤 의미일까요?  

    

 직장을 그만두고 홀로 글을 쓰는 삶에 지쳐 모든 것을 포기해버리고 싶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한 친구와 등산을 했습니다. 그것은 술을 진탕 마시려는 ‘회피’도 아니었고, 나의 문제를 친구가 모조리 해결해주기를 바라는 ‘의존’도 아니었습니다. 그 등산길에 누구에게도 받지 못한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믿음’이었습니다. “나에게 힘든 일이 있을 때, 저 친구가 반드시 도와주겠구나.”라는 믿음. 그 든든한 믿음으로 다시 힘든 세상살이를 속으로 들어가 제 삶을 일으켜 세울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우정의 도움입니다.

      

 ‘도움’을 주지 않는다면 친구가 아닙니다. 하지만 그 ‘도움’은 우리네 삶의 문제를 전적으로 해결해주는 ‘도움’이 아닙니다. 진정한 우정의 ‘도움’은 친구가 언제든 우리를 도와줄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으로 스스로 자신의 곤경을 헤쳐 나갈 힘과 용기를 얻게 되는 일. 그것이 다른 누구도 결코 줄 수 없는, 오직 진정한 친구만이 줄 수 있는 ‘도움’입니다. 우리가 경제적으로 힘들 때 친구가 돈을 건네 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돈은 우정의 도움이 될 수 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 돈에서 돈 자체, 즉 경제적 가치만 본다면 그것은 우정의 ‘도움’이 아니라 ‘회피’와 ‘의존’으로 전락하게 될 겁니다. 하지만 그 돈에서 경제적 가치가 아니라 ‘믿음’, 즉 언제든 저 친구가 나를 도와줄 것이란 믿음을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진정한 우정의 ‘도움’을 받게 됩니다. 그러한 진정한 '도움'을 받았다면 우리는 친구에게 돈을 받을 필요가 없게 됩니다. 진정한 우정의 '도움' 즉, ‘믿음’은 스스로 자신의 삶을 헤쳐 나갈 힘을 주게 되니까요.       


 이제 하나의 질문만이 남습니다. 그런 진정한 우정은 어디서 오늘 걸까요? 즉, 그 친구는 언제든 나를 도와줄 것이라는 '믿음'은 어디서 오는 걸까요? 다시 친구와 등산한 이야기를 조금 더 이어가 볼까요? 온갖 걱정으로 인해 불안, 우울, 두려움으로 가득 찬 머릿속을 비우려 친구와 등산을 했습니다. 그런데 등산 도중 또 하나의 걱정거리가 생겨 버렸습니다. 거칠어진 호흡과 후들거리는 다리로 산을 오르는 친구가 걱정되었습니다.

      

 친구가 들고 있던 무거운 짐을 제가 들고 산을 올랐습니다. 숨이 턱까지 차며 정상에 올랐을 때 깨달았습니다. “내가 힘들 때 언제든 너도 나를 도와주겠구나.” 그런 ‘믿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제 마음 속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던 걸까요? 산을 오르는 동안 단 한 번도 친구에게 도움 받을 것을 생각하지 않고, 내가 친구를 어떻게 도와주어야 하나라는 생각만 했습니다. 바로 그때 깨달았습니다. 


   

 “내가 저 친구를 생각하는 마음처럼, 저 친구도 나를 생각하고 있겠구나!” 이것이 바로 우정의 도움, “내게 무슨 일이 있을 때 저 친구가 도와줄 것이다”라는 ‘믿음’입니다. 왜 흔한 친구가 ‘믿음’이 아니라 ‘회피’나 ‘의존’의 대상이 되는지 알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세상 사람들은 친구에게 도움을 바라기만할 뿐, 정작 자신은 친구를 진심으로 도와줄 생각은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정말 힘들 때는 나도 너를 도와주지 않을 텐데, 너라고 나를 도와주겠어?” “나는 너를 도와줄 생각이 없지만 너는 나를 도와줬으면 좋겠어.” 이것이 세상 사람들이 흔한 친구를 대하는 은밀한 속내일 겁니다. 전자의 마음이 ‘우정’을 ‘회피’(“술이나 진탕 마시자”)로 전락시키고, 후자의 마음이 우정을 ‘의존’(“내 문제 해결해줘”)으로 전락시킵니다. 역설적이게도, 친구의 도움은 친구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자신이 어떤 곤경에 처하더라도, 반드시 도와줄 친구가 있나요? 만약 그런 친구가 한 명이라도 있다면 우리는 그 친구 덕분에 그 어떤 곤경도 능히 헤쳐 나갈 수 있을 겁니다. 그 친구가 우리에게 “네게 무슨 일이 생기면 반드시 너를 도우려 갈게!”라는 ‘믿음’을 줄 테니까요. 진정한 우정을 찾고 있나요? 친구들의 도움이 우리를 돕는 것이 아니라 친구들이 도와줄 것이다라는 믿음이 우리를 돕는다.” 에피쿠로스의 이 말의 행간을 읽어야 합니다. 그 행간의 의미를 마음에 담아야 합니다. “무슨 일이 있을 때 도움을 받을 친구가 아니라 무슨 일이 있더라도 도움을 줄 친구를 찾으라!”


    

『철학자의 일상적 조언』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 시방세계현전신十方世界現全身무문관』 46칙 간두진보 

    

 “나를 돌보지 않음으로 나를 돌본다.” 사랑과 우정의 역설이죠.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거나 좋아하면 자신을 돌볼 수가 없습니다. ‘나’보다 ‘너’가 더 걱정되기 때문이죠. ‘나’보다 더 걱정되는 ‘너’가 있나요? ‘나’보다 먼저 돌봐야 하는 ‘너’가 있나요? 그런 ‘너’가 없다면 ‘나’는 반드시 세상살이에 짓눌려 질식하게 될 겁니다.


 많은 이들이 자신을 제대로 돌보지 못합니다. 이는 지금이 사랑과 우정의 상실의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모두들 온통 ‘나’의 걱정에 빠져 ‘나’를 돌볼 생각뿐이기 때문이다. 이는 얼핏 합리적인 것 같습니다. 지금처럼 각박한 세상에서 ‘나’ 스스로를 돌봐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어리석은 생각도 없습니다. 자기걱정과 자기돌봄은 시기의 차이가 있을 뿐, 필연적으로 불행해집니다. 어려운 말도 아니지 않나요? 항상 자기 것만 챙기려는 이를 도와주고 싶은 이가 있을까요? 온통 자신의 걱정에 휩싸여 자신을 돌볼 생각뿐인 사람은 결국 혼자 남겨질 수 밖 없습니다. 


 ‘사랑과 우정은 선택사항이다.’ 자본의 시대, 아니 야만의 시대가 왜곡한 삶의 진실입니다. 이 왜곡된 삶의 진실을 바로 잡을 시간입니다. 사랑과 우정은 결코 삶의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사랑과 우정이 증발한 자리에 남겨지는 것은 더 큰 불안과 더 깊은 허무뿐이니까요. 자본 혹은 야만의 시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다름 아닌 바로 사랑과 우정입니다. 

 

 각박한 세상살이 씩씩하게 헤쳐 나가고 싶은 가요? 선가禪家의 오래된 깨달음을 하나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 시방세계현전신十方世界現全身!” 이는 백 척이나 되는 아찔한 높이의 대나무 끝에서 한 걸음을 내디딜 때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는 의미입니다.

 

 야만의 시대에서 우리는 어떻게 ‘나’ 돌보지 않고 ‘너’를 돌볼 수 있을까요? 그것은 정말 백척간두에서 진일보하려는 결단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처럼 보입니다. 우리에게 그 결단이 필요합니다. ‘백척간두진일보’의 심정으로 ‘나’보다 더 걱정스러운 ‘너’를 찾아야만 합니다. 그렇게 그 ‘너’를 아끼고 보살피며 사랑과 우정을 복원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에게 새로운 세계가 펼쳐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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