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자기부정 : 디오게네스

어떻게 나를 긍정할 것인가?

디오게네스는 사람들이 보고 있는 가운데 자위에 열중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배도 이런 식으로 비비기만해도 배고픔이 사라지면 좋으련만” 그리스철학자 열전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성적이 그게 뭐야” “업무처리가 엉망이네” “넌 약속 잘 안 지키잖아.” 


누군가로부터 비난받으면 불쾌합니다. 왜 불쾌한 것일까요? 단순히 욕먹었기 때문일까요? 이는 표면적인 이유에 불과합니다.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자기부정입니다. 타인으로부터 비난 받을 때의 불쾌함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타인의 비난이 곧 자신에 대한 비난이 될 것이라는 무의식적 직감입니다. 타인에게 욕을 먹을 때, 곧 자신 역시 자신을 욕하게 될 것이라는 직감이 누군가로부터 비난받을 때 찾아드는 깊은 불쾌감의 정체입니다.


 정말 그렇지 않나요? 철부지 아이 혹은 생면부지의 이가 우리를 비난할 때 그다지 큰 불쾌감을 느끼지 않지요. 이는 상대의 비난이 자기부정으로 잘 전환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이의 비난은 철없는 소리일 뿐이고, 생면부지인 이의 비난은 근거 없는 헛소리일 뿐이니까요. 타인의 부정(비난)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이 자기부정으로 전환될 때입니다. 타인에게 부정(비난) 당할 때, 조금씩 우리 자신을 부정(비난)하게 되기 때문에 타인으로부터 부정(비난)당하는 것이 그리도 싫은 것이지요.


 자기부정. 이는 정말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 이러저런 부정적인 생각‧감정(증오‧분모‧복수심‧시기‧질투…)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그런 부정적인 생각‧감정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모두 자기 파괴적인 양상을 띱니다. 그 중 가장 자기 파괴적인 부정적 생각‧감정이 바로 자기부정입니다. 이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내가 나를 부정하는 일’은 ‘내가 나를 파괴하는 일’에 다름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부정적인 것들을 제거하고 싶어 합니다. 여드름이나 흉터 혹은 징그러운 벌레를 제거하고 싶은 마음처럼, 우리가 부정하는 존재들(게으른 이‧위선적인 이‧기만적인 이…)을 제거 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런 부정적인 존재가 바로 자신이면 어떻게 될까요? 자신을 제거하고 싶어질 수밖에 없지요. 그러니 자기부정을 해소하는 일은 단순히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사회적(어쩌면 물리적) 생존과 직접적으로 관계해 있는 문제인 셈입니다.


 어떻게 자기부정 너머 자기긍정에 이를 수 있을까요? 디오게네스의 기행에 그 실마리가 있을 겁니다. 디오게네스는 개집 같은 독에서 기거하며 남루한 옷을 입고 구걸을 하며 살아가는 철학자였습니다. 그런 그가 사람들 모인 광장에서 자위를 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배도 이런 식으로 비비기만해도 배고픔이 사라지면 좋으련만” 디오게네스는 정신이상자이거나 변태 성욕자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엽기적이고 충격적이기까지 한 그의 기행은 우리가 어떻게 자기부정을 해소하여 자기긍정에 이를 수 있는지에 대해 말해줍니다. 자기부정은 분명 타인의 부정으로부터 옵니다. 그렇다면 타인은 어떤 근거로 우리를 부정하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흔히 문명이라고 부르는 일체의 것들, 관습‧전통‧제도‧교육‧도덕‧윤리‧법률입니다. 누군가 관습‧전통‧제도‧교육‧도덕‧윤리‧법률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게 될 때, 세상 사람들로부터 그를 부정(비난)하게 되고, 그 때문에 그는 끝내 자기부정에 이르게 되는 것이지요. 


 자기부정의 발생원리는 다음과 같이 도식화할 수 있습니다. ‘관습‧전통‧제도‧교육‧도덕‧윤리‧법률→타인의 부정→자기부정’ 이 도식은 우리네 삶에 흔히 나타는 광경입니다. “성적이 그게 뭐야” 왜 성적이 나쁘다고 비난할까요? 그것은 기존의 ‘교육‧제도’에 벗어나기 때문이지요. “업무처리가 엉망이네” 왜 업무 실수가 있을 때 비난할까요? 그것은 직장의 ‘전통‧윤리’에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넌 약속 잘 안 지키잖아” 왜 약속을 지키기 않으면 비난할까요? 그것은 사회적 ‘윤리‧법률’에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타인은 특정한 문명(관습‧전통‧제도‧교육‧도덕‧윤리‧법률)에 근거해서 우리를 부정합니다. 결국 자기부정은 근본적으로 인간이 만든 관습‧전통‧제도‧교육‧도덕‧윤리‧법률에서 기원하는 셈입니다. 그렇다면 자기부정을 해소하기 위해 모든 관습‧전통‧제도‧교육‧도덕‧윤리‧법률을 무시해야 하는 걸까요?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관습‧전통‧제도‧교육‧도덕‧윤리‧법률이 인간 사회를 덜 혼란스럽게 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니까요.      


 하지만 그 분명한 사실만큼이나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인간이 만든 문명(관습‧전통‧제도‧교육‧도덕‧윤리‧법률)이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을 억압하고 있다는 것! 이제 디오게네스의 기행 역시 조금 더 납득할 수 있을 겁니다. 디오게네스는 왜 광장에서 자위를 했을까요? 식욕과 성욕은 모두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입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이 둘을 동등한 위상으로 긍정하지 않습니다. 광장에서 식사는 할 수 있지만 자위를 하는 것은 관습‧전통‧제도‧교육‧도덕‧윤리‧법률에 벗어나는 일이니까요.    


 

 세상 사람들이 광장에서 식욕을 해결하며 성욕을 상상할 때, 디오게네스는 광장에서 성욕을 해결하며 식욕을 상상했습니다. 디오게네스는 왜 그랬던 걸까요? 그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을 억압하는 인간이 만든 문명(관습‧전통‧제도‧교육‧도덕‧윤리‧법률)의 허위의식을 폭로하고, 그것을 넘어서고자했던 겁니다. 그것을 넘어설 때만 자기부정 너머 진정한 자기긍정에 이를 수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사실 자기긍정은 어렵지 않습니다. 자신의 자연스러운 본성에 충실하면 됩니다. 하지만 이런 본성은 항상 인간이 만든 문명(관습‧전통‧제도‧교육‧도덕‧윤리‧법률)에 의해서 억압받게 되죠. 디오게네스는 바로 이런 삶의 진실을 날카롭게 포착했던 겁니다. 타인의 비난 너머 자신을 긍정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만든 일체의 위선적이고 기만적인 문명(관습‧전통‧제도‧교육‧도덕‧윤리‧법률)을 넘어서야 한다! 이것이 디오게네스가 포착한 삶의 진실이었습니다.      


 자기긍정은 흔한 자기계발서에 나오는 낭만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진짜 사랑은 고되게 아프고 때로 위험한 것처럼, 진정한 자기긍정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긍정에 이르고 싶다면 기존의 전통‧제도‧교육‧도덕‧윤리‧법률을 넘어서야 합니다. 타인에게 실재적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인간이 만든 일체의 관습‧전통‧제도‧교육‧도덕‧윤리‧법률을 과감하게 넘어서려 해야 합니다. 그렇게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본성에 충실하며 살아가려 애를 써야 합니다. 그것이 자기긍정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철학자의 일상적 조언』

나는 맛의 즐거움사랑의 쾌락듣는 즐거움아름다운 모습을 보아서 생기는 즐거운 감정들을 모두 제외한다면agathon을 무엇이라고 생각해야 할지 모르겠다단장」 에피쿠로스  

   

자기긍정에 이르고 싶은가요? '개'처럼 사세요. 디오게네스는 정말 개처럼 살았습니다. 이는 그가 기초세운 ‘시니시즘cynicism’이라는 사상의 어원에서 분명히 확인됩니다. 디오게네스를 따르며 ‘시니시즘’을 표방했던 일군의 철학자들을 ‘키니코스’kynikos(견유犬儒)학파라고 합니다. ‘키니코스(견유犬儒)’는 ‘개犬 같은 선비(학자)儒’ 정도로 번역할 수 있을 겁니다. ‘시니시즘’의 ‘시닉’cynic의 어원이 고대 그리스어 ‘키니코스kynikos’(개와 같은)이기 때문입니다. 


 디오게네스도, 그의 가르침을 따르던 수많은 견유학파들도 모두 ‘개’처럼 살기를 소망했습니다. 하지만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개'처럼 산다는 것이 자신의 욕구만을 중시하며 방종하게 산다거나 타인에게 줄 피해나 상처를 아랑곳하지 않는 짐승처럼 산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디오게네스 혹은 키니코스 학파가 말하는 ‘개’처럼 산다는 것은 ‘시니시즘’적으로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니시즘’은 무엇일까요?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든 문명(관습·전통·제도·교육·도덕·윤리·법률) 을 넘어서서 인간의 본성에 따라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사상체계입니다. 우리 역시 ‘개’처럼, 즉 ‘시니시즘’적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개’는 성적이 떨어지는 것을 신경 쓰지 않지요? 성적이 떨어졌다고 누군가 비난하는 것 역시 신경 쓰지 않습니다. ‘개’는 돈이 없다고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돈이 많다고 우쭐거리거나 돈이 없다고 비난 받을 것을 신경 쓰지 않습니다. ‘개’는 불면증이 없습니다. 졸릴 때 그저 편히 잠을 자니까요. ‘개’는 업무 실수를 했다고 주눅 들지 않습니다. ‘개’는 상사와 사장의 비난 역시 개의치 않을 겁니다. ‘개’는 또 다른 곳에서 먹이를 구하면 그만이니까요.


 ‘개’는 약속 시간을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 때문에 누군가로부터 비난 받아도 자신을 비난하지도 않습니다. ‘개’가 약속 시간에 늦은 것은 상대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기 때문일 뿐이니까요. ‘개’처럼 사랑하세요. 상대의 재산, 지위, 명성 따위는 상관치 않고 보고 싶은 이가 있다면 몇 날 며칠을 하염없이 그의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개’처럼 말입니다. 이렇게 시니시즘적 ‘개’처럼 살아가세요. 그때 자기부정 따위는 가볍게 넘어버려 진정한 자기긍정에 이를 수 있을 겁니다.                             

이전 01화 자아 : 헤라클레이토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