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
흐르는 강물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것은 같은 강물에 발을 두 번 담글 수 없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의 진정한 의미는 어떤 것들은 변화함으로써만 같아진다는 의미다.「우주의 파편들The cosmic fragments」 헤라클레이도스 저, 제프리 커크 편집
‘나’는 누구일까? 누구나 한 번 즈음 해본 질문일 겁니다. 세상 사람들은 ‘나’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없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지요. 하지만 누구에게나 불현듯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몰라서 혼란스러워지는 순간이 찾아오곤 합니다. 바로 ‘자아’에서 벗어나게 되는 순간입니다.
‘자아’는 무엇일까요? 자신이 생각하는 ‘나’입니다. 쉽게 말해, ‘자아’는 ‘나는 이런 사람이지’이라는 생각입니다. 이런 ‘자아’ 관념에서 벗어나는 감정, 욕망, 행동을 만나게 될 때 우리는 당혹감을 마주하게 됩니다. 내가 생각하는 나는 이해심이 많은 사람인데, 작은 일에 갑자기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가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나는 용기 있는 사람인데, 작은 위험 앞에서 비겁해질 때가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나는 성실한 사람인데, 작은 변화 때문에 게을러질 때가 있습니다.
이런 순간에 당혹감에 휩싸이게 됩니다. 이 당혹감(“내가 대체 왜 이러지?”)은 우리네 삶에 크고 작은 혼란을 야기합니다. 즉, 낯선 ‘나’를 만나게 되었을 때 삶의 혼란을 겪게 됩니다. 왜 그런 것일까요? ‘자아’는 세계를 맞이하는 토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종다양한 세계(음식‧음악‧영화‧직장‧친구‧가족…)를 경험하고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그 세계의 경험‧해석‧수용의 중심에는 ‘자아’가 있습니다.
즉 ‘자아’가 있기 때문에 특정한 음식‧음악‧영화를 경험하고 해석하고 선별해서 받아들이게 되지요. 쉽게 말해 ‘자아’가 있기 때문에 직장에서는 직장인으로 행동하고, 친구를 친구처럼, 가족은 가족처럼 대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자아’ 덕분에 우리는 세계를 안정적으로 경험하고 해석하고 수용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중요한 이유죠.
낯선 ‘나’의 출현은 ‘자아’의 균열이고, 이는 일종의 정서적 지진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명료하고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할 때 극심한 혼란과 불안을 겪게 됩니다. ‘자아(나는 이런 사람이지)’는 세계를 맞이하는 토대이기 때문에 ‘자아’가 흔들릴 때, 세계를 맞이하는 토대가 뒤흔들리고 갈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정서적 지진에서 누구도 예외적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왜 ‘자아’에 대해 분명하게 답할 수 없을까요? 이는 우리가 질문 자체를 잘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일 겁니다. ‘나는 누구인가?’를 묻기 전에 ‘나를 어떤 형식으로 규정하려 하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아’를 물을 때 이미 형식을 전제하고 묻습니다. 자아를 ‘점’, 즉 고정된 형태로 전제하고 자아를 규명하려고 하지요, 이것이 우리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명료하게 답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잘못된 전제로부터는 결코 올바른 결론을 얻어낼 수 없으니까요.
이 난해한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 먼저 헤라클레이토스의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흐르는 강물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것은 같은 강물에 발을 두 번 담글 수 없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의 진정한 의미는 어떤 것들은 변화함으로써만 같아진다는 의미다.” 다소 난해한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먼저 흐르는 강물 앞에 서 있다고 해봅시다. 우리는 그 강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죠. ‘강물이 끊임없이 흘러가는구나. 그래서 같은 강물에 발을 두 번 담글 수는 없겠구나.’ 즉, 어제의 강물과 오늘의 강물은 다른 강물이라고 생각을 하지요.
이는 옳은 생각일까요? 강물은 항상 흘러가기 때문에 늘 새로운 강물인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흘러가는(변하는) 강물을 보며 그것이 (항상 변하지 않는) 강물이라는 것을 인식합니다. 이는 뒤집어 생각해보면 더욱 명료해집니다. 만약 흘러가지 않는 강물이 있다면 어떨까요? 우리는 그것을 호수 혹은 저수지로 인식할 순 있어도 결코 강물이라고 인식하지 못할 겁니다. 강물이 강물일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끊임없이 변화하기(흘러가기) 때문입니다.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처럼, “어떤 것들은 변화함으로써만 같아지게” 됩니다. 우리의 ‘자아’ 역시 이런 강물과 같습니다. ‘자아’가 ‘자아’일 수 있는 이유는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입니다. ‘자아’가 변화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아’가 아닐 겁니다. 친절하고 온화한 자아를 가진 이가 있다고 해봅시다. 그가 매순간 심지어, 근거 없는 모욕과 폭력 앞에서도 친절하고 온화하다면 우리는 그가 ‘자아’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그의 ‘자아’(정체성)를 인식하기는커녕 의심하게 될 겁니다.
“흐르는 강물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 그것의 진정한 의미는 어떤 것들은 변화함으로써만 같아진다는 의미다.” 헤라클레이토스의 이 말은 이렇게 바꿀 수 있습니다. “‘나’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것의 진정한 의미는 ‘나’는 변화함으로써만 ‘나’일 수 있다는 것이다.” ‘자아’는 ‘점’이 아니라 ‘선’입니다. ‘나’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끊임없이 흘러갑니다. ‘나’가 ‘나’일 수 있는 이유는 ‘자아’가 고정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자아’가 끊임없이 변화해나가기 때문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해 혼란스럽고 불안한 이유를 알겠습니다. ‘자아’ 관념을 ‘점’으로 고정시켜 놓고, 그것에 벗어나는 자신의 감정, 욕망, 행동을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성실한(선한‧이해심 많은‧용기 있는) 사람이야’ 이처럼 특정한 ‘자아’로 고정시켜 놓으려 하죠. 바로 이것이 있는 그대로의 ‘자아’를 발견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누구나 살아가면 상황과 조건에 따라 게을러지는(악해지는‧분노하는‧비겁해지는) ‘나’를 필연적으로 만나게 될 수밖에 없으니까요.
직장에서는 게으른 ‘나’였지만 좋아하는 일을 할 때는 성실한 ‘나’일 수 있습니다. 비 오는 날은 우울한 ‘나’였지만, 청명한 하늘 아래서 유쾌한 ‘나’일 수 있습니다. 친구 앞에서는 활발한 ‘나’이지만, 연인 앞에서는 수줍은 ‘나’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낯선 ‘나’가 출현한다고 해서, 즉 수시로 ‘자아’가 변한다고 해서 ‘나’가 누구인지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 끊임없는 ‘나의 변화 자체’가 바로 진정한 ‘나’이니까 말입니다.
진짜 ‘나’는 누구일까요? 상황과 조건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나’입니다. 즉, 수없이 등장하는 낯선 ‘나’가 만들어내는 끊임없는 물살 그 자체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그 변화하는 ‘나’들이 어떤 경향성도 없다면, 그것 역시 진짜 ‘나’라고 말하기 어려울 겁니다. 그런 ‘나’는 미숙한 변덕에 잠식당한 자이거나 정신이상자일 테니까요. 진정한 ‘나’는 끊임없는 변화가 만들어내는 경향성, 달리 말해 끊임없이 변화하는 ‘선’들이 만들어내는 ‘파형’의 모습일 겁니다.
‘나’는 바다입니다. 무한히 다양한 모습의 파도가 만들어내는 한결 같은 바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자아입니다.
『철학자의 일상적 조언』
본질이란 본래 차이이다. 그러나 또한 본질에게 반복함으로써 자기 자신과 동일해지는 능력이 없다면, 본질을 다양하게 만드는 능력, 다양해질 능력도 없을 것이다. 『프루스트와 기호들』 질 들뢰즈
일관성을 지키려 하지 마세요. 순간순간 변화하는 몸과 마음에 충실하려고 하세요. ‘나’라는 본질은 본래 순간순간 변화하는 차이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나’는 그렇게 마주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매번 차이만을 지향하며 살아가면 되는 것일까요? 쉽게 말해, 매번 변덕만을 부리고 살면 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나’라는 본질은 차이(단독성)지만, 그 본질이 일정 정도 반복(일관성)되지 않는다면 그 역시 ‘나’라고 말할 수 없을 겁니다. 치매나 정신병 때문에 끊임없이 횡설수설(차이)하는 이를 두고 ‘나’라는 본질이 있다고 말하기 어려운 것처럼 말입니다. ‘나’라는 본질은 ‘차이’(단독성)와 ‘반복’(일관성)에 관계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요소는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반복’은 ‘차이’ 없음이고, ‘차이’는 ‘반복’ 없음이니까요.
‘나’라는 본질, 즉 진정한 ‘나’는 ‘차이’와 ‘반복’ 사이에 있습니다. 어떻게 그 모순 속에서 진정한 ‘나’를 만날 수 있을까요? 매혹적인 음악처럼 살아가면 됩니다. 매혹적인 음악은 분명 각 음계의 ‘차이’로 만들어지죠. 하지만 ‘차이’ 밖에 없다면 그것은 곧장 소음으로 전락하게 될 겁니다. 매혹적인 음악은 각 음계의 ‘차이’들이 몇 마디를 두고 ‘반복’합니다. 그 ‘차이’와 ‘반복’이 만들어내는 하모니가 바로 음악이지요.
우리의 ‘자아’ 역시 그렇습니다. 매 순간 마다 ‘차이’(단독성)를 긍정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 ‘차이’만 있어서는 안 되겠지요. 그 ‘차이’가 일정 기간 안에서 ‘반복’(경향성)되어야 합니다. 그 ‘차이’와 ‘반복’이 만들어내는 하모니가 바로 ‘자아’입니다. 건강한 자아란, ‘차이’와 ‘반복’의 하모니입니다. ‘차이’를 ‘반복’하고, 그 ‘반복’이 다시 ‘차이’를 만들어낼 때, 우리의 ‘자아’는 스스로를 다양하게 만드는 능력을 갖게 될 겁니다. ‘나’를 알고 싶다면 끊임없이 변화하는 ‘나’(음계)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파형(선율!)을 파악하려고 해야 합니다.
'나'는 음악입니다. 다양한 음들이 어울려 만들어내는 한결 갈은 음악. 매번 다르지만 또 매번 같은 음악. 그것이 바로 진정한 '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