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지금 이런 글이나 써댈 때인가?" 매일 아침 철학 나부랭이 글이나 쓰고 있는 내가 한심해보였다.
2.
“토요일 저녁은 아이들이랑 먹어.” “왜?” “여의도 나가보려고” “왜 그렇게 과몰입이야.” “지금이 그런 이야기할 때야? 이게 투표하고 안하고 같은 문제인 거야? 계엄이라고, 계엄. 왜 그리 철이 없어. 우리가 누리는 작은 일상이 당연하게 아니잖아.”
5년? 7년? 마지막으로 아내에게 화를 낸 적이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딱히 돈도 못벌고, 좋은 남편도, 좋은 아빠도 아니었기에 아내에게 화를 내는 건 언감생심이었다. 그런 아내에 화를 내었다. 화를 내고 나서야 알았다. 그 화는 아내를 향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누리고 있는 일상의 기쁨을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소시민을 향한 것이었단 걸.
나는 그 소시민들이 자신의 이기심을 방어하기 위해 ‘나’와 ‘너’와 ‘우리’의 일상을 지키려는 이들의 작은 용기를 폄훼하는 일에 분노했던 것이다. 아니다. 더 정직하게 말해, 내일 당장 파괴될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일상을 지켜보며 할 수 있는 것이 딱히 없는 무력한 자신에게 화를 낸 것일지도 모르겠다. 책상을 내린 친 손이 얼얼해졌다.
3.
유사 이래 한반도에서 살았던 그 많은 이들 중 참혹한 전쟁과 독재를 겪지 않은 세대는 현재 생존하고 있는 40~10대뿐이다. 그외 모든 세대, 모든 이들은 국가 권력에 의해 개 끌려가듯 도륙당했던 시대를 살았다. 우금치, 부마, 광주, 제주 그리고 이름 모를 모든 곳들에서.
친구와 수다, 연인과 포옹, 아들, 딸과 식사, 부모와 산책. 일상의 기쁨은 당연하지 않다. 최고 권력자의 단 한마디로 이 모든 기쁨은 간절히 바라는 희망으로 전락할 수 있다. 일상적 기쁨이 간절한 희망으로 전락한 곳을 지옥이라고 한다. 지옥은 결코 멀리 있지 않다.
국가 좆망의 기로에 서 있다. 아니 지옥의 문턱에 와 있다. 이는 결코 비유가 아니다. 국가는 원래 폭력의 장치이며 동시에 중앙집권적이다. 그래서 국가 폭력이 ‘밖’으로 향할지 ‘안’으로 향할지는 소수의 사람에 의해 결정될 뿐이다. 국가가 존속하는 한 우리는 항상 아슬아슬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우리가 그 항시적 위험을 애써 은폐하고 있을 뿐이다.
일상의 기쁨을 빼앗긴 자를 ‘노예’라고 한다. 누군가 일상의 기쁨을 빼앗으러 올 때, 두려움에 맞서 의연히 맞서 싸우는 자를 ‘주인’이라 한다. 폭력의 두려움에 잠식당할 때 노예가 되고, 그 두려움에 당당히 맞설 때 ‘주인’이 된다. 오직 ‘주인’만이 일상적 기쁨을 누릴 자격이 있다. 지금은 과몰입이 필요한 때다.
‘나’와 ‘너’와 ‘우리’가 ‘노예’가 될지, ‘주인’이 될지를 확증해야 하는 순간이다. 나는 ‘주인’이 되려고 한다. 부끄럽게 살고 싶지 않다. 공무원으로서 문형순은 "부당함으로 불이행"했지만, 철학자로서 나는 "부당함으로 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