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운동이거나 표상이다.
기억의 가변성
제2장의 제목이 “<상들의 식별에 대하여 : 기억과 뇌>예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번 장에서는 기억과 뇌에 관한 이야기를 할 거예요. 먼저 베르그손의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우리 몸을 둘러싸고 있는 사물들은 몸에 작용하며, 우리 몸은 그것들에 반작용한다. 우리 몸의 반작용은, 경험이 그것의 실체 속에 만들어 놓은 기구들의 본성과 수에 따라, 다소간 복잡하기도 하고 다양하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의 몸이 과거의 행동을 저장할 수 있는 것은 운동 장치들의 형태 아래서이며, 오로지 그것들 아래서만 가능하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치킨을 먹는다고 해봅시다. 이때 “사물(치킨)들은 몸에 작용하며, 우리 몸은 그것들에 반작용”하겠죠. 치킨 냄새가 우리 코(몸)에 작용할 테고, 혀(몸)는 그것들에 반작용하느라 침이 고이겠죠. 여기서 “몸의 반작용”, 즉 경험(몸의 반응)에 대해서 조금 더 깊게 생각해 볼까요? 치킨이 몸에 작용했을 때 모든 사람이 동일한 경험(몸의 반응)을 하게 될까요? 그렇지 않죠. 심지어 같은 사람이라도 하더라도 매번 다른 경험(몸의 반응)을 하게 될 거예요.
치킨을 좋아하는 사람과 치킨을 싫어하는 사람이 치킨을 경험하는 양상은 다를 수밖에 없잖아요. 또 치킨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배가 부르냐 배가 고프냐’라는 조건에 치킨은 다르게 경험될 수밖에 없잖아요. 이는 사람마다 혹은 (같은 사람이라도) 상황마다 치킨(사물)이라는 실체 속에서 만들어 놓은 경험이 다르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몸의 반작용(경험)”은 “다소간 복잡하기도 다양하기도” 한 양상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는 거죠.
“우리의 몸이 과거의 행동을 저장할 수 있는 것은 운동 장치들의 형태 아래서만 가능하다” 이제 베르그손의 이 말을 이해할 수 있죠. 과거의 행동은 기억으로 우리의 몸에 저장되죠. 그런데 그 저장은 “운동 장치의 형태 아래서”만 가능한 거예요. 사물(치킨)에 대한 기억은 운동 장치의 형태(치킨을 좋아하는 사람이냐? 아니냐? 혹은 배고프냐 배고프지 않냐?)로서의 몸에 따라 달리 저장되는 것이죠. 이는 과거가 항상 같은 양상으로 기억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죠. “운동 장치의 형태”는 매 순간 달라질 수밖에 없으니까요.
기억의 두 형태
과거는 유일한 하나의 사실에 관한 기억이 아니죠. 과거는 항상 가변적인 형태로 기억될 수밖에 없어요. 베르그손은 기억의 이런 특성, 즉 기억의 가변성을 설명하기 위해 몇 가지 이론을 제시합니다.
과거는 두 가지 다른 형태로 존속한다. 1) 신체 운동 기제 속에 존재한다. 2) 독립적인 기억들 속에 존재한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상한 훈제 치킨을 먹고 식중독으로 크게 고생한 기억이 있어요. 이 단일한 과거 사건은 두 가지 형태로 기억돼요. 첫째는 “신체 운동 기제 속”에서 기억될 수 있고, 둘째는 “독립적인 기억들 속”에서 기억될 수도 있죠. 기억이 “신체 운동 기제 속”에 남는 경우는 어떤 걸까요? 훈제 치킨을 거부하는 거예요. 제 “신체 운동 기제”가 이제 훈제 치킨을 거부하는 것으로 기억하는 거죠. 제 몸이 훈제 치킨은 이제 쳐다보기도 싫고 못 먹는 훈제 치킨으로 기억하는 거죠. 이처럼 과거의 어떤 일은 우리의 “신체 운동 기제 속”에서 기억될 수 있어요.
두 번째 경우, “독립적인 기억”은 뭘까요? 제 신체 운동 기제와 별개로, 있는 그대로의 훈제 치킨을 기억할 수 있잖아요. 제가 훈제 치킨을 먹고 안 먹고를 떠나서 훈제 치킨이 있다는 사실을 독립적 기억할 수도 있잖아요. ‘이건 후라이드 치킨이고, 이건 훈제 치킨이구나’ 하는 식으로요. 이처럼 기억은 두 가지 형태로 존재하는 거예요. 신체가 반응하는 기억이 있고, 대상 그 자체를 인식할 수 있는 기억이 있는 거죠. 이제 우리는 기억에 대한 또 하나 진실을 포착할 수 있어요.
기억은 운동이거나 표상이다.
현재 대상의 식별은 대상으로부터 나올 때는 운동에 의해 이루어지고, 주체로부터 나올 때는 표상에 의해 이루어진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먼저 ‘기억’과 ‘식별’에 대해서 알아봐요. ‘식별’은 어떤 대상을 다른 대상과 구별한다는 것이잖아요. ‘이것은 탕수육이 아니라 치킨이다.’ 이는 치킨을 ‘식별’하는 것이잖아요. 즉, ‘식별’은 과거 ‘기억’을 바탕으로 다시 인식再認하는 거예요. 과거 ‘기억’했던 사물을 지금 다시 인식할 때 그것을 ‘식별’할 수 있게 되니까요. 베르그손은 이제 지금 내 눈앞에 있는 “현재 대상의 식별”이 어떤 메커니즘으로 작동하는지를 말하려고 해요.
지금 제 눈앞에 훈제 치킨을 갖다 놓으면 그건 ‘식별’이잖아요. 여러 대상 사이에서 다른 어떤 것과도 구별되는 훈제 치킨을 ‘식별’할 수 있죠. 그런데 이 ‘식별’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어요. ‘대상’으로부터 나오는 경우와 ‘주체’로부터 나오는 경우에요. 전자의 경우, 즉 ‘대상’으로부터 나오는 ‘식별’은 어떤 것일까요? 과거 상한 훈제 치킨(대상)을 먹고 고생한 적이 있는 제가 지금 실제 훈제 치킨(대상)을 보고 “윽, 훈제 치킨이다”라고 ‘식별’하는 경우죠. 이 ‘대상’으로부터 나온 ‘식별’은 “운동에 의해 이루어지게” 되죠. 즉 ‘대상’(훈제 치킨)을 통한 ‘식별’은 훈제 치킨을 멀리하는 ‘운동’을 통해 이뤄지게 되잖아요.
그렇다면 후자, 즉 (실제 치킨은 없는 상황에서) ‘주체(나)’부터 나오는 ‘식별’은 어떻게 이뤄질까요? ‘표상’을 통해서죠, 상한 훈제 치킨을 먹고 고생했던 일들이 ‘표상’됨으로써 ‘식별’하게 되는 거예요. 즉, 기억이 ‘대상’으로부터 나올 때는 ‘운동’, ‘주체(나)’로부터 나올 때는 ‘표상’으로 식별되는 거예요. 이것이 ‘식별’의 두 가지 양태에요.
또 다른 예시를 들어 볼까요? 연인과 행복한 시간을 보냈던 기억이 있다고 해봅시다. 그러다 어떤 이유로 헤어졌고, 다시 1년 후에 사람들이 붐비는 거리에서 다시 만난 거예요. 이는 ‘대상’으로부터 나온 ‘식별’이고, 이는 곧 ‘운동’이죠. 우리는 연인을 인지하는 동시에 그의 곁으로 걸어가고 있을 테니까요. 반대로 연인을 만나지 못했지만 비슷한 사람을 만나서 연인을 ‘식별’할 수 있겠죠. 이 ‘식별’은 ‘주체’로부터 나온 ‘식별’이고, 이는 ‘표상’이죠. 연인과 함께했던 추억들이 다시 떠오르게 되는 거죠. ‘식별’은 그렇게 일어나는 거예요. ‘대상’으로부터 나올 때는 ‘운동’, ‘주체’로부터 나올 때는 ‘표상’.
뇌는 운동에 영향을 미칠 뿐, 기억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사람들은 시간을 따라 배열된 기억으로부터, 미세한 단계들을 통해, 공간 속에서 발생 중인(시발적인) 행동 또는 가능적인 행동을 그리는 운동들로 이행한다. 뇌의 손상은 이 운동들에 해를 입힐 수는 있겠으나, 이 기억들에 대해서는 그럴 수 없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어려운 말이 아니에요. 우리의 기억은 과거, 현재, 미래로 계속 연결되는 시간의 배열에 따라서 구성되어 있겠죠? 이러한 기억은 미세한 여러 가지 단계를 통해서 우리가 속해 있는 공간 안에서 시발적이거나 가능적인 운동을 만들어내게 돼요. 10년 동안 매일 체육관에서 운동을 해온 사람이 있다고 해봐요. 그는 10년이라는 “시간을 따라 배열된 기억”을 갖고 있겠죠. 그 기억은 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체육관에서 들어서면 자연스럽게 운동을 시작하는(시발적인) 행동을 하게 되겠죠. 또 매일 체육관에 가서 운동을 할 수 있는 가능적인 행동하려고 하겠죠. 즉, “시간에 따라 배열된 기억”, 즉 기억의 누적은 “공간 속에서 발생 중인 행동 또는 가능적인 행동을 그리는 운동으로 이행”하게 되는 거죠. 우리가 어떤 공간(체육관·도서관)에서 특정한 행동(운동·공부)을 하는 건 그 순간의 의지 문제가 아니에요. 시간을 따라 배열된 기억이 얼마나 쌓여있느냐의 문제인 거죠. 쉽게 말해, 우리의 시발적인 혹은 가능적인 행동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습관’의 문제인 거죠.
불운한 사고로 10년 동안 운동한 그 사람이 뇌를 다쳤다고 해봅시다. 흔히 우리는 뇌의 손상으로 운동했던 기억이 훼손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잖아요. 베르그손은 그렇게 보지 않아요. 뇌의 손상은 ‘운동(움직임)’들에 해를 입힐 수는 있어도, ‘기억’ 그 자체를 훼손할 수는 없다고 말해요. 즉, 10년 동안 운동한 이의 뇌가 손상되면, 체육관에서 몸을 움직이는 운동을 할 수 없게 되는 것이지, 운동했던 그 기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죠. 기억은 뇌 속에 없기 때문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