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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동물' 너머 '사랑적 동물'로

‘분할’, 사회적 소통과 행동을 위한 진화 결과

인간은 있는 그대로의 세계, 즉 ‘운동’을 ‘분할’해서 점들로 보죠. 인간은 왜 그렇게 하는 걸까요? 베르그손은 수학을 근간으로 하는 근대과학의 발전을 주요한 원인이라고 진단하죠. 근대과학의 발전이 ‘운동’을 ‘궤적’처럼 감각하게 만든 측면이 있죠. 음악은 분명 수학적으로 표현할 수 있죠. 도는 1, 레는 2, 미는 3 등등으로 ‘분할’해서 표현할 수 있죠. 하지만 ‘도레미’라는 선율(운동)과 ‘1·2·3’이라는 점들의 연합(궤적)은 결코 같을 수 없죠.


이는 언제 알 수 있을까요? 수학(과학)자에게 음악을 들려줄 때죠. 철저하게 수학(과학)적으로 훈육된 이들은 음악을 수학(과학)적으로 환원할 수는 있겠지만, 음악을 진정으로 들을(느낄!) 수는 없죠. ‘운동(지속)’하는 세계를 분할된 점(숫자)으로 이어 붙여 감각하려는 이들은 결코 ‘운동(지속)’을 볼 수 없을 거예요.


그렇다면, 수학과 과학이 발전하기 전에는 인간은 ‘운동’의 세계를 볼 수 있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은 훨씬 이전부터 ‘운동’보다 ‘궤적’을 보는 데 적응해 왔을 거예요. 왜냐하면 인간은 타자와 소통하고 행동해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죠. 인간에게 수학 혹은 과학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객관적인 소통과 효율적인 행동을 위한 도구죠. 수학(과학)이 없다면, A에서 B까지의 거리가 얼마든지 객관적으로 소통할 수 없잖아요. 다들 어림짐작(주관적)으로 파악하고 말할 수밖에 없겠죠. 그로 인해 효율적인 행동 역시 할 수 없게 되겠죠.


‘운동’은 모호함(주관성)이고, ‘궤적’은 분명함(객관성)이죠. 인간은 사회를 이루며 살아야 하는 동물이죠. 그래서 한 생명이 인간으로 진화했던 그 순간부터 소통과 그로 인한 행동은 매우 중요했을 겁니다. 바로 이것이 인간이 ‘운동’보다 ‘궤적’으로 세계를 감각하려고 했던 이유였을 겁니다. 세계를 ‘운동’인 아닌 ‘궤적’으로 감각하는 편이 소통하고 행동하는 데 훨씬 유용하고 유익했을 테니까요. 근대에 접어들어 수학과 과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던 이유 역시 이러한 유용과 유익을 극대화하려는 인간의 진화 결과였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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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운동’을 그 자체로 보게 되는 순간


하지만 인간에게는 ‘궤적’을 넘어 ‘운동’을 그 자체로 보게 되는 순간이 있죠. 바로 사랑하는 순간이죠.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두 사람, ‘진우’와 ‘현주’가 있어요. 10년 동안 두 사람은 사랑을 이어오고 있어요. 이들에게 서로의 이름은 아무 의미도 없어요. 이름을 바꿔도 돼요. 아무 상관이 없어요. 왜냐하면 그 둘은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서로의 ‘운동’(흐름)을 매 순간 느껴왔고, 느껴갈 것이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이름(점!)으로 서로를 ‘분할’(한정·고정)시킬 필요가 없죠. ‘진우’와 ‘현주’는 매 순간 서로에게 다른 ‘운동’으로 존재할 테니까요.


하지만 이는 진짜로 사랑하는 사이일 때만 가능한 예외적 경우죠. 일반적 관계에서 이런 식으로 관계 맺는다면, 제대로 소통하고 행동할 수 없게 돼요. ‘현주’가 자신의 친구들에게 ‘진우’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는 데, ‘우리 브라이언은 그런 면이 있지’라고 말했다고 해봐요. ‘현주’를 제외하면 그게 무슨 말인지 아무도 모르잖아요. ‘현주’의 시선에서는 한 달 전에는 ‘진우’였지만, 한 달 후에는 그 ‘진우’가 ‘브라이언’처럼 느껴질 수 있죠.


그런데 이런 방식으로 일반적 사회생활을 할 수는 없잖아요. ‘현주’ 이외에 다른 어떤 사람도 ‘진우’의 ‘진동(운동)’을 파악할 수 없을 테니까요. 한 사람의 끊임없는 ‘운동’(진동)은 모호하고 흐릿하기에 오직 사랑하는 이만 포착할 수 있어요. 사랑 이외의 관계, 즉 사회(일반)적으로 소통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려면, 어쩔 수 없이 ‘운동’ 중인 사물을 ‘분할’(한정·고정)시켜서 단면을 잘라서 ‘점’으로 만들 수밖에 없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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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밀화와 추상화

그림으로 비유하자면, 사랑의 관계는 ‘추상화’고 사회적 관계는 ‘정밀화’라고 말할 수 있어요. 우리는 사진처럼 찍은 정밀화를 보면 서로 사회적(객관적)으로 소통하고 행동할 수 있잖아요. “여자가 예쁘더라.” “머리가 길더라.”라고 말이죠. 그런데 고흐의 그림을 보면 어때요? 소통이 안 되잖아요.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를 보고 무슨 소통을 어떻게 하겠어요? 그 그림을 보고 각자 촉발되는 ‘순수 기억’이 전부 다 다를 텐데.


‘정밀화’가 ‘점’ 혹은 ‘궤적’을 그리는 것이라면, ‘추상화’는 ‘운동’ 혹은 ‘지속’을 그리는 거예요. 모네의 <수련>은 진짜로 좋은 작품이에요. 그 작품은 세계의 한 단면(점)을 포착한 게 아니에요. 끊임없이 빛이 산란하며 비치는 움직임(운동), 끊임없이 바람이 이는 움직임(운동) 그 자체를 표현한 거예요. 그래서 추상화를 보고서는 사회적(객관적) 소통이 불가능한 거예요. 만약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나 모네 <수련>을 보고 소통할 수 있다면, 그것은 사랑의 관계인 거죠. 서로의 ‘순수 기억’이 마주칠 수 있는 사랑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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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을 보는 ‘주의’ 깊은 삶


우리는 사회적 존재이고 일상적인 생활을 해야 하는 존재죠. 그래서 불가피하게 ‘운동’을 ‘분할’해서 ‘궤적’으로 보는 습관이 생긴 거예요. 일종의 효율성인 거죠. 세계를 ‘궤적’으로 보는 건 분명 인간다움이죠. 하지만 이는 서로 소통하며 행동해야 하는 ‘사회적 동물’로서의 인간다움일 거예요. 그런데 인간다움 너머의 인간다움도 있어요. 그것은 ‘궤적’을 보려는 '습관'적인 삶 넘어 ‘운동’을 보려는 ‘주의’ 깊은 삶으로 나아가는 것이죠. 쉽게 말해, 사회적 관계 넘어 사랑적 관계를 구성해 나가는 일일 거예요.


이는 배부른 소리이거나 사치스러운 이야기가 아니에요. 우리는 언제 사랑과 예술을 찾게 될까요? 일상, 즉 사회적 관계에 지쳤을 때죠. 먹고 살기 위한 효율적인 삶에 지쳤을 때 사랑하는 이를 만나고 싶고, 음악이 듣고 싶고, 그림이 보고 싶잖아요. 인간은 ‘사회적 동물’로만 존재할 수 없어요. 진정으로 인간답다는 것은 ‘사회적 동물’ 너머 ‘사랑하는 동물’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사랑하는 이와 그림을 보러 가세요. 둘이 그림을 보고, 별말 없이 서로 얼굴 보면서 한 번 웃으면 돼요. 그러면 서로 다 느낀 거예요. 이것이 ‘사랑하는 동물’로서 살아가는 모습일 거예요. 물론 필요하면 ‘정밀화’도 보겠지만, 끝내는 ‘추상화’로 나아가려는 삶. 객관적인 소통과 행동 넘어 모호하고 불투명한 마음이 어떠한 매개도 없이 직접적으로 포개지는 소통과 행동. 그것이 인간다움 너머의 인간다움일 거예요. 바로 이것이 우리가 ‘궤적’을 보려는 습관 넘어 ‘운동’을 보려고 애를 써야 하는 이유죠. 진정으로 인간다운 삶이란, ‘사랑(운동!)’하는 이와 함께 ‘예술(운동!)’을 느낄 수 있는 삶일지도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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