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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과 물리학으로는 세계의 진실에 이를 수 없다.

진짜 ‘운동’은 상대적인 운동이 아니라 절대적 운동이다.

있는 그대로의 세계는 ‘운동’이죠. 우리는 이를 보지 못하죠. 우리가 뭔가 움직이고 있다고 보는 건 ‘운동’이 아니라 ‘궤적’이에요. ‘궤적’이 아닌 진짜 ‘운동’, 즉 ‘실재 운동’이라는 게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어요. (우리가 볼 수 없는) ‘실재 운동’은 어떤 형식으로 드러나고 있을까요?


베르그손은 진짜 ‘운동’이 무엇인지 밝히기 위해 먼저 두 가지 가짜 ‘운동’인 ‘수학적 운동’과 ‘물리적 운동’을 비판해요. 베르그손은 왜 ‘수학적 운동’과 ‘물리학적 운동’을 비판할까요? 근대적 교육의 자장 속에 있는 이들은 이 두 가지 운동을 진짜 ‘운동’이라고 여기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에요.


우리 역시 그런 측면이 있죠. 뭔가가 움직이면, 우리는 그것이 수학적 혹은 물리적 현상이라고 여기잖아요. 즉, 수학적인 움직임(운동) 혹은 물리학적 움직임(운동)이 곧 진짜 ‘운동’이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잖아요.

하지만 ‘수학적 운동’도 ‘물리학적 운동’도 진짜 ‘운동’이 아니에요. 진짜 ‘운동’, 즉 ‘실재 운동’은 (상황에 따라 변하는) 상대적 ‘운동’일 수 없고 (항상 고유한 성질을 갖는) 절대적 ‘운동’이어야 하잖아요.


무엇인가 ‘실재’한다는 건 그런 거잖아요. ‘실재’한다는 건 절대적으로 존재한다는 의미죠. 상황과 조건에 따라 상대적으로 변하는 것들을 ‘실재’한다고 말할 수는 없잖아요. 상대적으로 작은(큰) 키는 ‘실재’ 키가 아닌 것처럼 말이에요. 베르그손에 따르면, ‘수학적 운동’도, ‘물리학적 운동’도 모두 상대적 ‘운동’일 뿐이에요. 그래서 그 둘은 모두 ‘실재 운동’이 아닌 거죠. 이에 대해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알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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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적 운동’은 ‘실재 운동’이 아니다.


먼저 ‘수학적 운동’이 왜 ‘실재 운동’이 아닌지부터 밝혀봅시다. ‘실재 운동’에서 ‘실재’라는 것은 뭐예요? 진짜로 있다는 것은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것이죠. ‘황진규’는 존재하죠. ‘실재’로 존재하잖아요. 그럼 ‘황진규’는 상대적인 존재인가요? 절대적인 존재인가요? 절대적인 존재죠. 누구 옆에 있으면 사라지거나 작아지는 게 아니잖아요. ‘황진규’가 ‘실재’로 있다는 것은 상대적인 개념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존재한다는 거예요. 이는 ‘수학적 운동’과는 근본적으로 다르죠.


Ⅱ. 실재 운동들이 있다.

수학자는 상식의 관념을 더 큰 정확성을 가지고 표현한다. 이 때문에 위치를 좌표들이나 축들로부터의 거리로, 운동을 그 거리의 변화로 정의한다. 따라서 그는 운동에 대해 길이의 변화밖에는 알지 못한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수학적 운동’의 정의가 뭐예요? 위치의 이동, 즉 길이의 변화죠. 수학에서는 이를 ‘운동’으로 인정하죠. 수학에서는 “운동을 그 거리의 변화로 정의”해요. 왜냐하면 수학자들은 “운동에 대해 길이의 변화밖에 알지” 못하기 때문이죠. 예를 들어, 3차원 그래프에서 x축으로 a만큼, y축으로 b만큼, z축으로 c만큼의 이동한 거리에서 잡힌 점 A가 있다고 해봐요. 수학에서는 원점에서 점 A까지의 거리인 K를 ‘수학적인 운동’량이라고 말해요. 그래서 점 위치에 따라서 운동량이 달라질 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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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왜 ‘수학적인 운동’은 ‘실재 운동’이 아닐까요? K의 길이(위치 이동)가 운동량이라면 이는 상대적이기 때문이에요. 좌표평면 위에서 K만큼의 길이를 만들어낼 수 있는 위치는 무한하죠. K의 길이를 나타낼 수 있는 수없이 많은 점이 존재하잖아요. 즉 K의 길이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거죠. 그래서 이를 ‘실재 운동’이라고 말할 수 없는 거예요. 즉 ‘수학적인 운동’은 ‘실재 운동’이 아닌 거죠.


운동이 거리의 변화로 환원된다면, 동일한 대상이 그것에 관여시키는 좌표에 따라 움직이는 것도 되고, 움직이지 않는 것도 되며 또 절대적 운동도 없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실재’ 세계는 수학적 좌표평면이 아니잖아요. 만약 ‘실재’ 세계가 수학적 좌표평면처럼 “운동이 거리의 변화로 환원된다면”, 동일한 대상은 “움직이는 것도 되고, 움직이지 않는 것도” 될 수 있죠. ‘이는 너무 쉽게 알 수 있어요. -1과 +1의 길이는 같죠? 그러니 ‘수학적 운동’으로는 같은 거예요. 하지만 ‘실재 운동’은 전혀 다르잖아요. 하나가 없는(-1) ‘운동’과 하나가 있는(+1) ‘운동’은 전혀 다른 ‘운동’이잖아요. 우리네 삶을 생각해 봐요. 배가 고픈 상황(-1)에서 ‘운동’과 배가 부른 상황(+1)에서 ‘운동’은 전혀 다른 ‘운동’이잖아요.


그뿐인가요? 원래 사과가 없었던 이에게 사과가 없는 상황은 ‘–1’인 상황(운동)일까요? 그렇지 않죠. 그것은 ‘0’(변함없음)인 상황이잖아요. 오직 사과가 이미 하나 있었던 이에게만 사과가 없는 상황이 ‘–1’인 상황(운동)이 되는 거잖아요. 하지만 수학에서 이는 모두 같은 ‘운동’이라고 볼 거예요. 수학에서 ‘운동’은 “거리의 변화로 환원”되니까요. 즉, ‘수학적 운동’은 상대적이기에 결코 “절대적 운동” 즉 ‘실재 운동’이 될 수 없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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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적 운동’은 ‘실재 운동’이 아니다.


이제 ‘물리학적 운동’에 대해서 이야기해 볼까요? ‘수학적인 운동’은 비교적 쉽게 ‘실재 운동’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지만, ‘물리학적 운동’은 좀 달라요. ‘수학적 운동’은 좌표평면이라는 ‘가상’의 세계를 가정하지만, ‘물리학적 운동’은 ‘실재’ 자연 현상을 표현하기 때문이에요. 예를 들어, 제가 북쪽으로 1km ‘운동’하는 것과 남쪽으로 1km ‘운동’하는 것은 (수학적으로는 같은 운동일 수 있지만) 물리학적으로는 다를 수 있는 운동이죠.


왜 그럴까요? 물리학에서는 속도 개념이 들어가기 때문이에요. 제가 북쪽과 남쪽으로 동일한 1km로 이동하더라도, 각각 어느 속도로 갔느냐에 따라서 둘의 운동량은 다르잖아요. 그래서 물리학(자연과학)적 운동은 ‘실재 운동’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한 거예요. 하지만 ‘물리학적 운동’ 역시 ‘실재 운동’이라고 말할 수 없어요.


‘물리학적 운동’에서 중요한 개념 중 하나가 질량이에요. 수학에서 말하는 ‘점’을 물리학에서는 ‘질점’이라고 말해요. 물리학에서 점이 존재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질량이 없는 것은 공간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에요. 즉, 물리학에서는 어떤 존재이든 반드시 질량을 갖고 있어요. 그래서 ‘물리학적 운동’은 ‘P(운동량)=m(질량)⨯v(속도)’이 되는 거죠. 베르그손의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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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재 운동은 실재 원인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즉 어떤 힘으로부터 나온다는 점에서 상대적 운동과 구별된다고 할 것인가? 그러나 힘이라는 말의 의미에 관해 합의해야 할 것이다. 자연과학에서 힘은 질량과 속도의 함수일 뿐이다. 그것은 가속도에서 측정된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베르그손은 ‘물리학적 운동’이 ‘실재 운동’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답하려면, “힘이라는 말의 의미에 관해 합의”해야 한다고 말해요. 힘은 ‘F(힘)=m(질량)a(가속도)’잖아요. 그런데 ‘가속도(a)’ 역시 ‘속도(v)’이기 때문에 근본적인 의미에서 ‘힘’은 곧 ‘운동량(P=m⨯v)’이라고 말할 수 있죠. 그렇다면 이러한 물리학적 ‘힘(F)’ 혹은 ‘운동량(P)’은 ‘실재 운동’일까요? 전혀 그렇지 않죠. 왜 그런지 설명해 볼게요.


‘P(운동량)=m(질량)⨯v(속도)’가 의미하는 바가 뭐겠어요? (아인슈타인이 등장하기 전까지) 뉴턴은 물질의 운동(P)이 절대적이라고 말했어요. 이는 얼핏 그럴듯해 보이죠. 물리학에서는 모든 물체마다 고유한 질량(m)을 갖고 있고, 속도(v)나 가속도(a) 역시 다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죠. 그래서 ‘물리학적 운동’인 ‘운동량(P)’이나 ‘힘(F)’은 절대적 운동, 즉 ‘실재 운동’처럼 보이기도 하죠. (각각의 고유한 질량과 속도를 가진) 깃털과 돌멩이의 운동량과 힘은 상황과 조건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 각각이 가진 절대적인 ‘운동’처럼 보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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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적 운동’은 절대적 공간을 가정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하나의 큰 맹점이 있어요. 바로 공간에 관한 논의죠. 베르그손의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그것(힘·운동량)이 공간에서 일으킨다고 간주되는 운동에 의해서만 그것은 알려지고, 평가된다. 그것은 그런 운동과 연계되어 있으므로 그것의 상대성을 나누어 가진다. 그러므로 절대적 운동의 원리를 그와 같이 정의된 힘에서 찾는 물리학자는 그들 체계의 논리에 의해 그들이 앞서 피하기를 원했던 절대 공간의 가정으로 되돌아온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운동량’이나 힘은 “공간에서 일으킨다고 간주 되는 운동에 의해서만 알려지고 평가”될 수밖에 없죠. 질량에 속도(가속도)를 곱하는 게 ‘운동량’(힘)이고, 이것이 절대적 ‘운동’이 되려면 하나의 전제가 필요하죠. 바로 절대적 공간이죠. 모든 물체가 절대적으로 동일한 공간 속에 존재한다는 가정 아래서만 ‘물리학적 운동’은 절대적 ‘운동’이 될 수 있는 거예요.


예를 들어, 20kg짜리 돌을 30m/s 속도로 던질 때 운동량은 600kg·m/s이겠죠. 이는 절대적 운동량일까요? 전혀 그렇지 않죠. 같은 질량의 이 돌을 같은 속도로 달이나 토성에서 던지면 어떻게 될까요? 그 공간 속에서 이 ‘운동량’은 달라질 수밖에 없겠죠. 이처럼 물리학적 운동이 절대적 ‘운동’처럼 보이는 건, 이미 절대적 공간을 가정했기 때문일 뿐인 거죠.


그래서 “절대적 운동의 원리를 … 힘에서 찾는 물리학자는 그들 체계의 논리에 의해 … 절대 공간의 가정으로 되돌아” 올 수밖에 없는 거죠. 절대적 공간을 상정하지 않는다면, ‘물리학적 운동’은 결국 지극히 상대적인 ‘운동’이 될 수밖에 없으니까요. 간단히 말하자면, 물리학적으로 ‘실재 운동’이 가능하려면, 공간이 실재적(절대적)이어야 한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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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적 자장 안에서는 결코 세계의 진실에 이를 수 없다.


그런데 실재 공간은 어떨까요?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이론’으로 밝혔던 게 뭐예요? 절대적인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죠. 쉽게 말해, 공간은 상황과 조건에 따라 휜다는 거예요. 공간은 중력에 따라서 휘어요. 즉 공간은 절대적이지 않은 거죠. 실재 공간이 상대적이라면, ‘물리학(자연과학)적 운동’은 결코 ‘실재 운동’이 될 수 없죠.


구체적으로 말해, 같은 질량의 물체가 같은 속도로 A에서 B까지 이동한다고 해도 그 ‘운동량(p)=m(질량)⨯v(속도)’은 상대적일 수 있는 거죠. 이것이 아인슈타인의 등장 이후 뉴턴의 물리학이 ‘고전’ 물리학이라는 이름을 달고 뒤로 물러나게 된 이유예요. 아인슈타인은 공간이 상대적이라는 것을 증명했기 때문에 뉴턴의 운동량도 ‘실재 운동’이 아닌 거예요. ‘P’가 물리학적 운동이라면, 이는 상대적인 운동일 수밖에 없기에 이는 ‘실재 운동’이 아닌 거죠.


세계는 ‘실재(절대적) 운동’이죠. 이 세계의 진실은 ‘수학적 운동’이나 ‘물리학적 운동’으로 드러나지 않아요. ‘수학적 운동’도, ‘물리학적 운동’도 모두 상대적 운동을 가리키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죠. 베르그손이 왜 ‘지성’에 반대했겠어요. 우리가 말하는 ‘지성’이라는 건 근대적 교육 자장 안에서 형성된 관념이잖아요. 베르그손은 이러한 근대적 자장 안에서는 결코 세계의 진실에 이를 수 없다고 판단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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