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재 운동’은 세계 그 자체다.
‘수학적 운동’과 ‘물리학적 운동’은 모두 가짜 ‘운동’이죠. 그렇다면 베르그손이 말하는 절대적인 진짜(실재) ‘운동’은 어떤 것일까요?
운동은 거역할 수 없는 하나의 실재이다. 전체의 어떤 부분이 움직이는지를 말할 수 없다고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전체에는 여전히 운동이 있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실재 “운동은 거역할 수 없는 하나의 실재”에요. 즉 세계(우주) 전체로서 절대적인 것이죠. 이는 ‘존재’하는 것이 ‘운동’하는 것이 아니라, ‘운동’ 그 자체가 바로 (세계 전체로서) ‘존재’라는 의미예요. 왜냐하면 ‘운동’은 이미 떨리는 진동(파동)인데, 떨리지 않는 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거역할 수 없는 하나의 실재”, 즉 세계(우주) 전체는 그 자체로 ‘실재 운동’인 거죠.
그런데 우리는 이 ‘실재 운동’을 좀처럼 파악할 수 없죠. 세계 전체가 ‘운동’이라 하더라도, 그 “전체 중 어떤 부분이 움직이는지를” 알 수 없기 때문이죠. 바람이 불고, 파도가 치고, 해가 뜨는 이 모든 끊임없는 “운동은 거역할 수 하나의 실재(세계 전체)”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그 세계 전체로서의 ‘운동’이 어떤 부분들의 ‘운동’에 의해 발생하게 되는지 명확히 파악할 수 없잖아요. 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전체(세계)에는 여전히 운동이” 실재하는 거예요.
‘자연’은 절대적 운동이고 ‘자연물’은 상대적 운동이다.
(운동이 있다면) 운동을 단순한 관계로 파악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의 절대이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만약 “운동이 있다면”, 그것은 “단순한 관계로 파악”할 수 없어요. 왜냐하면 ‘운동’은 어떤 관계성으로 파악되는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그것은 하나의 절대”이기 때문이죠. ‘실재 운동’은 하나의 거대한 절대적 세계예요. 이는 ‘자연’과 ‘자연물’의 관계로 설명할 수 있어요. 세계는 ‘자연’ 그 자체이고, 그 부분이 ‘자연물’이죠. 세계에 존재하는 다수의 대상(바람·파도·햇볕·꽃·나무·새…)은 다 ‘자연물’이죠. ‘자연’은 이런 ‘자연물’들을 끊임없이 ‘운동’하게 하는 힘이죠. 우리가 사는 거대한 세계를 잘 살펴봐요.
봄이 되면 봄 햇살에 꽃이 피고, 여름이 되면 뙤약볕에 녹음이 푸르러 온갖 생명들이 생기를 얻죠. 가을이 되면 선선한 바람에 단풍이 들고, 겨울이 되면 눈이 내리고 나뭇잎들은 떨어지죠. 이러한 ‘자연물’(부분)들의 변화(운동)는 항상 일어나죠. 이러한 부분 변화(운동)를 있게 하는 힘(운동)은 뭔가요?
바로 ‘자연’이죠. ‘자연’이라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절대적!) ‘운동’(세계!)이 있기 때문에 부분적(상대적) ‘운동’이 발생하는 거잖아요. 말하자면, ‘자연’은 ‘실재 운동’이고, ‘자연물’은 ‘수학적 운동’이나 ‘물리학적 운동’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거예요. ‘자연’은 “거역할 수 없는 하나의 실재” 즉 세계 그 자체로서 절대적 ‘운동’이고, ‘자연물’(파도)은 부분(바람)과 부분(바다)의 관계에 의해서 촉발되는 상대적 ‘운동’이기 때문이죠.
‘공간’ 속에 ‘운동’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운동’이 ‘공간’의 토대다.
우리는 왜 ‘실재 운동’을 잘 파악하지 못할까요? 바로 ‘공간’ 때문이죠. 우리는 어떤 ‘운동’이 있을 때, 그것을 항상 ‘공간’과 연관 지어 생각하는 습관이 있죠. ‘공간’을 통해서만 ‘운동’을 떠올리는 것은 인간의 아주 오래된 습관이에요. 들판이나 산(공간)에서 벌어지는 일(꽃·녹음·단풍·눈…)들을 통해서만 계절의 변화(운동)를 생각하잖아요. 베르그손에 따르면, 이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운동)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오류에요.
공간은 실재 운동이 자리 잡는 지반이 아니다. 반대로 공간을 자신 아래에 놓는 것이 바로 실재 운동이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흔히 우리는 세계 전체를 특정한 ‘공간’이라고 생각하죠. 그리고 ‘운동’은 그 ‘공간’ 안에서 벌어지는 특정한 움직임이라고 여기잖아요. 쉽게 말해, 지구(세계)라는 ‘공간’이 먼저 있고, 그 안에서 여러 가지 ‘물질(꽃·벌·개·인간…)’의 ‘운동’이 일어난다고 생각하잖아요. 즉 ‘공간’을 “실재 운동이 자리 잡는 지반”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하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에요.
“공간을 자신 아래에 놓는 것이 바로 실재 운동”인 거예요. 즉 ‘실재 운동’이 먼저 있고, 그로 인해 ‘공간’이 만들어지는 거예요. 쉽게 말해, ‘운동’이 ‘공간’의 토대인 거죠. 집이라는 ‘공간’을 생각해 봐요. 집이 있기 때문에 그 안에서 특정한 ‘운동’(청소)이 있다고 여기죠. 그런데 세계 전체가 다 ‘운동(진동)’이잖아요. 그러니 그 집을 구성하는 외벽들 역시 다 ‘진동(운동)’이잖아요.
그럼 ‘공간’이 먼저예요? ‘운동’이 먼저예요? 당연히 ‘운동’이 먼저죠. ‘운동’(외벽)이 있기 때문에 ‘공간’(집)이 생긴 거니까요. ‘운동’은 특정한 관계에 의해서 발생하는 현상이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실재”, 즉 절대적인 존재(세계)인 거죠. 이처럼 ‘운동’이 ‘공간’에 종속되는 게 아니라 ‘공간’이 ‘운동’에 종속되는 거예요. 쉽게 말해, ‘공간’ 속에서 ‘운동’이 벌어지는 게 아니라, ‘운동’으로 인해 ‘공간’이 형성되는 거죠.
과학에서도 이러한 관점이 존재해요. 우주의 탄생 이론 중 ‘빅뱅 이론’이 있죠? 이는 대폭발(‘운동’)로 인해서 우주적 ‘공간’이 생성되었다는 이론이잖아요. 이 역시 베르그손의 ‘공간’과 ‘실재 운동’과의 관계를 뒷받침하죠. 엄청나게 격렬한 ‘실재 운동(대폭발)’으로 인해 ‘공간’이 생겼다는 거잖아요. 이는 우리네 삶의 문제와도 맞닿아 있을 거예요.
‘깨달음’이라는 ‘운동’, ‘사랑’이라는 ‘깨달음’
한 사람의 우주적 ‘공간’(세계)은 언제 열릴까요? 한 사람이 각성하는 순간이에요. “삶은 이런 것이구나!” “이렇게 살아야 하는구나!” 번개가 치는 것처럼 삶의 각성이 찾아오는 순간들이 있죠. 불교에서는 이를 ‘깨달음’이라고 해요. 이 ‘깨달음’은 정신 속에서 벌어지는 격렬한 내적 ‘운동’을 의미하죠. 바로 이 ‘운동’이 각자의 ‘공간’을 생성하죠.
어떤 깨달음(실재 운동)에 이른 후에는 물리적 ‘공간’이 변형(도시→산)되죠. 이는 ‘깨달음’에 이른 이들이 속세를 떠나 산속 어느 사찰로 들어가게 되는 경우겠죠. 그런데 ‘깨달음(실재 운동)’으로 인해 물리적 ‘공간’이 변형되지 않더라도, ‘공간’은 생성될 수 있죠. 이는 깨달음(강렬한 내적 ‘운동’)에 이른 선사들이 작은 골방에서 벽을 보고 앉아 있더라도 그곳에서 우주적 자유로움을 느끼게 되는 경우죠. 이는 고매한 이들의 ‘깨달음에’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사랑을 생각해 봐요. 사랑은 아주 강렬한 정신적 각성(깨달음)이잖아요. 한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될 때, 우리는 이전에는 결코 알 수 없었던 것, 언어로는 결코 다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것을 깨닫게 되잖아요. 그러니 사랑은 속세의 ‘깨달음’이라고 말할 수 있겠죠. 정신없이 일만 하던 직장인이 아주 위험한 교통사고를 가까스로 피했다고 해봐요. ‘내가 진짜 소중한 것을 놓치고 살았구나’라는 삶의 각성에 이를 수 있겠죠. 이렇게 가족에 대한 사랑을 깨닫게 될 수 있죠. 그때 그는 직장을 그만두고 가정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겠죠. 이는 사랑이라는 ‘실재 운동’이 ‘공간’을 변형(직장→가정)하는 현실적인 사례일 거예요.
사랑이라는 ‘깨달음’에 이르면 물리적 ‘공간’이 바뀌지 않아도, ‘공간’은 생성되죠. 매일 갔던 심드렁한 식당도 사랑하는 이와 함께 가면 매우 특별한 ‘공간’처럼 느껴지잖아요. 그뿐인가요? 사랑하는 이가 없을 때의 직장은 지옥 같은 ‘공간’이지만, 사랑하는 이가 있을 때의 직장은 사랑하는 이에게 맛있는 것을 사줄 수 있게 해 주는 소중한 ‘공간’으로 생성되죠. 이처럼 사랑이라는 깨달음(실재 운동)으로 인해 우리네 ‘공간’은 변형되거나 생성되죠.
수처작주 입처개진
스승님이 말씀하시길, 너희들은 이제 어디에 가든지 그곳에서 주인이 되도록 하라. 그러면 너희가 이르는 곳마다 모두 참(진실)된 곳이 될 것이다. 師云 你且 隨處作主 立處皆眞 『임제어록』 임제
선불교의 선사인 임제의 말을 이제 이해할 수 있죠. 우리는 어떤 ‘공간’에 가야지 주인으로서 ‘운동’(행동)할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하죠. 직장에 가면 노예이지만, 백화점에 가면 주인이 된다고 생각하잖아요. 하지만 임제 선사는 반대로 이야기해요. 우리가 어디에 가든 그곳에서 주인으로서 ‘운동’(행동)하면 우리가 “이르는 곳마다 모두 참된 곳”, 즉 주인의 자리(공간)가 될 것이라고 말하죠. 이는 베르그손이 말하려는 바와 정확히 일치하죠.
‘우주적 공간’이 ‘빅뱅(팽창-폭발)’이라는 격렬한 ‘운동’으로 생기는 것처럼, 우리네 ‘일상적 공간’ 역시 ‘깨달음’이라는 ‘실재 운동’을 통해서 생기는 거예요. 우리가 이미 주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운동) 순간, 우리가 어디에 있든 그 자리는 주인의 자리(공간)가 되는 거예요.
사랑은 강력한 ‘깨달음(운동)’이죠. 사랑할 때 누구나 영화 속 주인공이 되잖아요. 직장에서는 흔해 빠진 엑스트라일 뿐이었지만, 사랑할 때 삶의 주인공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죠. 세상의 모든 것들이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느끼잖아요. 사랑에 빠지면, 관심도 없던 흑백 영화에서 웃음이 나고, 흔해 빠진 유행가에서 눈물이 나게 되는 것도 그래서죠. 그것들은 모두 나를 위해 존재하는 영화와 음악이니까요. 그래서 사랑하면 때로 세계와 싸워야 한다는 깨달음에 이르기도 하죠. 소중한 사랑을 지킬 수 없다면, 다시 엑스트라로 전락하게 된다는 사실을 직감하니까요.
'사랑할 조건'이 '사랑'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사랑할 조건'을 만든다.
이처럼 한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할 때 자신이 삶의 주인이며, 또 그래야만 한다는 사실을 절절히 깨닫게 되죠. 이런 사랑이라는 ‘깨달음(운동)’은 우리에게 주어진 물리적, 정서적 ‘공간’을 모두 변형하고 생성하죠. 사랑이라는 ‘깨달음’을 얻어 우리가 가는 곳마다 주인이 된다면, 우리가 이르는 ‘공간’은 모두 참된 곳이 되기 때문이죠.
‘공간’에 의해서 ‘운동’이 형성된다고 생각하는 건 무지에요. 우리네 삶을 더 큰 슬픔으로 몰고 갈 무지죠. ‘독서실’(공간)에 가야 ‘공부’(운동)가 되고, ‘산속’(공간)으로 가야 ‘깨달음’(운동)에 이를 수 있는 게 아니죠. 이렇게 생각하는 이들은 늘 ‘공간’을 탓하느라 어떤 ‘운동’도 일으킬 수 없을 테니까요.
‘운동’에 의해서 ‘공간’이 형성되는 거예요.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 이 세계의 진실을 깨닫게 된 이들은 조금 더 기쁜 삶으로 나아갈 수 있어요. 이들은 ‘공부’(운동)하기 때문에 자신이 가는 곳마다 그곳을 ‘독서실’(공간)로 만들고, ‘깨달음’(공간)이 있기 때문에 자신이 가는 곳마다 그곳을 고요한 ‘산속’(공간)을 만들 수 있을 테니까요. 바로 여기에 사랑의 진실이 있죠. 사랑할 조건(공간)이 마련되어야 사랑(운동)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사랑(운동)할 때, 사랑할 조건(공간)이 마련되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