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은 ‘운동감각’과 ‘근육감각’으로 이뤄진다.
‘실재 운동’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이 있어요. ‘실재 운동’은 질적 변화를 촉발한다는 거죠. 어떤 ‘실재 운동’이 일어나면 양적인 변화만을 촉발하지 않아요. 왜 베르그손은 수학적 혹은 물리학적 운동이 ‘실재 운동’이 아니라고 했을까요? 이는 다 양적인 변화잖아요. 거리가 늘거나 줄고 혹은 질량에 속도를 곱할 때 발생하는 건 모두 양적인 변화잖아요. 베르그손에게 ‘운동’은 그런 게 아니에요. 질적인 변화가 일어나야 해요.
내 눈이 나에게 운동감각을 줄 때 그 감각은 실재이며, 한 대상이 내 눈앞을 이동하든 내 눈이 대상 앞에서 이동하든 뭔가가 실제로 일어난다. 더 강한 이유로, 내가 운동을 일으키기를 원한 후 그것을 일으키고 근육감각이 그것에 대한 의식을 가져올 때 나는 운동의 실재성을 확신한다. 그것은 운동이 내 속에서 상태의 변화 또는 질의 변화로 나타날 때 그 운동의 실재성이 손에 잡힌다고 말하는 것이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추운 겨울 산길을 걷다가 꽃이 하나 보였다고 해봐요. 이는 “내 눈이 나에게 운동감각을 주는” 상태인 거죠. 왜냐하면, 꽃의 ‘운동’ 즉 꽃의 움직임이나 향기 같은 것이 내 눈(코)을 통해서 나에게 전달되어 감각되는 상태이기 때문이죠. 그리고 “그 감각은 실재”죠. 그 꽃이 “내 눈앞으로 이동하든 내 눈이 대상(꽃) 앞에서 이동하든 뭔가가 실제로 일어난” 거잖아요. 하지만 이런 수동적(수용적)인 ‘운동감각’만으로 내가 ‘운동’했다고 말할 수 없죠.
능동적(발산적)인 ‘근육감각’이 필요하죠. 즉 나의 “근육감각이 그것(꽃)에 대한 의식을 가져올 때 운동의 실재성을 확신하게” 되죠. 쉽게 말해, 그 꽃을 보며 걸음을 멈추며(발의 근육감각) ‘참 서럽게도 예쁘게 피었구나’는 의식(뇌의 근육감각)이 촉발될 비로소 ‘실재 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거예요. 이는 질적인 변화죠. 이처럼, “내 속에서 상태의 변화 혹은 질의 변화로 나타날 때 그 운동의 실재성이 손에 잡힌다”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거죠.
‘실재 운동’은 질적 변화다.
실재 운동은 한 사물의 이동이라기보다 한 상태의 이동이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실재 운동’이라는 것은 특정한 “한 사물(물질)의 이동이라기보다” 특정한 “상태의 이동”을 의미해요. 이는 ‘실재 운동’은 ‘양’적인 변화가 아니라 ‘질’적인 변화라는 것이죠. “사물의 이동”은 양적인 변화이고, “상태의 이동”은 질적인 변화니까요. 이처럼 ‘실재 운동’이라는 것은 양적인 변화가 아닌 질적인 변화를 의미해요.
독서라는 ‘운동’을 예로 들어볼까요? 누군가 책을 100시간 읽는 ‘운동’을 했다고 해 봐요. 이는 ‘수학적 운동’일 수도 있고, ‘물리학적 운동’일 수도 있지만 ‘실재 운동’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어요. 책 읽는 행위가 ‘실재 운동’이 되려면, ‘운동감각’과 ‘근육감각’을 통한 어떠한 각성, 즉 질적인 변화, 즉 “상태의 이동”이 일어나야 해요. ‘아, 이런 말이구나!’ ‘아,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거구나!’ 이러한 깨달음(상태의 이동)의 순간이 있을 때만 비로소 독서라는 ‘실재 운동’을 한 거예요.
양적인 변화는 ‘실재 운동’이 아니에요. A에서 B로 가는 이동이 얼마나 긴지(얼마나 읽었는지), 혹은 어떤 물체가 얼마나 빠른지(어떤 책을 얼마나 빠르게 읽었는지)는 전혀 중요한 게 아니에요. 자동차가 달려서 어디에 도착했다고 해서 ‘실재 운동’이 일어난 게 아니에요. 그것은 (양적인 변화만을 일으키는) 수학·물리학적 이동일 수는 있어도 ‘실재 운동’일 수는 없어요.
‘실재 운동’이 되려고 하면 질적인 변화가 일어나야 해요. 쉽게 말해, 수학·물리학적 이동(거리)이 삶의 어떤 질적 변화를 촉발하는 ‘여행’이 될 때 비로소 ‘실재 운동’이 되는 거죠. 그래서 몇백 권의 독서보다 어느 짧은 시 한 구절이 더 강밀한 ‘실재 운동’이 될 수 있고, 몇백 킬로 떨어진 해외여행보다 사랑하는 이와 짧은 산책이 더 강밀한 ‘실재 운동’이 될 수 있는 거죠.
'침묵'은 ‘실재 운동’이다.
이제 우리는 ‘운동’에 관한 역설 하나를 생각해 볼 수 있어요. ‘운동’하지 않음으로 ‘운동’할 수 있다는 역설이죠. 먼저 베르그손의 이야기부터 들어봅시다.
한 소리가 다른 소리와 다른 것처럼, 소리는 침묵과 절대적으로 다르다. 빛과 어둠 사이, 색깔들 사이, 색조들 사이에 차이는 절대적이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베르그손은 “색깔들 사이, 색조들 사이에 차이는 절대적”이라고 말해요. 이와 마찬가지로, “한 소리(진동)가 다른 소리(진동)와 다른 것처럼, 소리는 침묵과 절대적으로 다르다”고 말해요. 이것이 어떤 의미일까요? 먼저 색을 생각해 봐요. ‘빨강’과 ‘파랑’은 질적으로 다르죠. 그래서 이 차이는 절대적이죠. 이는 그 두 색이 모두 ‘실재 운동’이라는 뜻이죠. ‘빨강’과 ‘파랑’이라는 색은 가시광선이라는 ‘운동(진동)’에 의해서 절대적인 차이를 드러내죠.
‘소리’ 역시 마찬가지죠, ‘음악’과 ‘소음’은 질적으로 다르죠. 즉 이 차이 역시 절대적이죠. 그래서 ‘음악’과 ‘소음’은 모두 ‘실재 운동’이에요. ‘음악’과 ‘소음’이라는 소리는 가청주파수라는 ‘운동(진동)’에 의해서 절대적 차이를 갖죠. 그런데 의아한 부분이 있죠.
“빛과 어둠 사이”도 절대적으로 다르고, “소리는 침묵과 절대적으로 다르다”고 말하는 대목이에요. ‘색(빨강-파랑)’과 ‘소리(음악-소음)’는 분명 ‘실재 운동’이잖아요. 그런데 ‘어둠’과 ‘침묵’은 조금 다르지 않나요? 그것은 칠흑 같은 ‘어둠’과 적막뿐인 ‘침묵’은 그 어떤 ‘운동’도 없는 상태처럼 느껴지잖아요. 바로 이 부분이 베르그손의 난해한 ‘실재 운동’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지점일 거예요.
'침묵'은 '소리'를 내포한다.
‘운동’에 대한 편견을 깨는데, ‘침묵’은 아주 효과적인 주제에요. ‘침묵’에 거리 이동이 있나요? 질량이나 속도가 있나요? ‘침묵’에는 진짜 정말 아무것도 없잖아요. 하지만 ‘침묵’은 분명한 ‘실재 운동’이에요. 왜냐하면 때로 ‘침묵’은 아주 강렬한 질적인 변화를 촉발하기 때문이에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음으로써 어떤 질적 변화를 촉발할 때가 있어요.
어머니가 희귀한 암에 걸렸었거든요. 그래서 치료도 받지 못하고 병원만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계속 검사만 하느라 애태우는 시간을 보낸 적이 있어요. 그때 주변에 “너무 슬프겠다. 그래도 힘내야지” 이렇게 말하는 이들이 많았어요. 그 이야기들은 제게 ‘수학적 운동’이거나 ‘물리학적 운동’일 수는 있었겠지만, ‘실재 운동’은 아니었어요. 왜냐하면, 그 ‘소리’가 제게 어떤 질적인 변화도 일으키지 못했기 때문이었죠.
그런데 한 친구가 어떻게 저의 소식을 들었는지 밤늦게 전화를 한 거예요. “괜찮나?” “그래, 다 겪는 일이다.” 이 짧은 대화 이후로 우리는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죠. 긴 ‘침묵’이 흐르다 통화는 끝났죠. 그런데 그 ‘침묵’은 슬픔으로 차가워진 제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었어요. 내 마음에 어떤 큰 질적인 변화가 일어난 거죠, 이는 그 어떤 많은 말(소리)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죠. 이처럼 ‘침묵’은 때로 강력한 ‘실재 운동’이 될 수 있는 거예요.
‘없음’은 강렬한 ‘운동’을 촉발한다.
이제 더 의아해지죠. ‘침묵’은 아무런 ‘운동(진동)’이 없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강렬한 ‘실재 운동’이 될 수 있는 걸까요? ‘침묵’에는 ‘운동’이 없지만, 어떤 ‘침묵’은 반드시 ‘운동’을 내포하기 때문이에요. 마음을 울리는 음악을 듣고 있다고 해봐요. 그 음악이 계속 이어지다가 클라이막스 부분에서 갑자기 음악이 딱 멈추고 정적이 흐르는 거예요.
그 정적에서 우리는 정말 ‘침묵’, 즉 ‘없음無’을 느끼나요? 그렇지 않죠. 오히려 그 정적의 순간, 어떤 질적 변화를 불러일으킬 강렬한 ‘운동’을 느끼게 되잖아요. 왜 그럴까요? 그 정적은 강렬한 ‘운동’을 내포하는 ‘침묵’이기 때문이에요. 물론 그 정적의 순간에는 어떤 ‘진동(운동)’은 없죠. 하지만 그 정적에는 아름다웠던 선율(진동)이 이미 내포되어 있잖아요.
하나에서 다른 것으로의 이행도 또한 절대적으로 실재적인 현상이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침묵’에 ‘운동(진동)’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 ‘침묵’이 “하나에서 다른 것으로의 이행”을 촉발한다면, 그것 “또한 절대적으로 실재적인 현상”, 즉 ‘실재 운동’이 되는 거죠. 음악이 흐르다 잠시 정적이 머물 때, 우리는 “하나(선율)에서 다른 것(감동)으로 이행”하게 되죠, 짧은 안부 인사 뒤에 침묵이 흐를 때, 우리는 “하나(대화)에서 다른 것(위로)으로 이행”하게 되죠. 심지어 짧은 안부 인사조차 없어도 상관없죠. 아니 저의 어머니가 아프다는 사실조차 몰라도 상관없죠. 한때 나를 진심으로 아껴주었던(운동!) 한 사람이 남긴 ‘말 없는’ 선물만으로도 깊은 위로를 받기도 했으니까요. 이처럼 어떤 ‘없음(침묵)’이 이미 ‘운동’을 내포하고 있다면, 그 ‘없음’은 강렬한 ‘운동’을 촉발해요.
‘어둠’과 ‘침묵’, ‘운동’하지 않음으로 촉발되는 강렬한 ‘운동’
‘침묵’은 ‘실재 운동’이에요. 왜냐하면 그 ‘침묵’은 ‘운동(진동)’ 없음으로써 더 강렬한 ‘운동(음악!)’을 만들기 때문이죠. 그래서 ‘침묵’ 자체가 ‘운동’이 되는 거예요. 물론 ‘침묵’이 항상 ‘운동’이 되는 건 아니죠. 어떤 이의 ‘침묵’이 나에게 ‘실재 운동’이 된다면, 그것은 그의 ‘침묵’ 이전에 아름다운 ‘선율’(마음이 담긴 편지와 선물)이 이미 존재했기 때문인 거죠. 항상 아무 말도 없었던 이의 ‘침묵’은 전혀 ‘운동’이 아니죠. 내 삶에 아름다운 음악처럼 이미 연주되고 있었던 바로 그 친구의 ‘침묵’만이 강렬한 ‘운동’이 되는 거죠.
‘어둠’도 마찬가지예요. 어떤 ‘침묵無’이 강렬한 ‘운동(음악)’이 되듯이, 어떤 ‘어둠無’은 강렬한 ‘운동’이 되죠. 난해한 철학(사람)을 이해하지 못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방황하고 있었던 적이 있었어요. 그 ‘어둠’은 제게 아무것도 ‘없음’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았어요. 제게는 철학 이전에 이미 보고 느꼈던 강렬한 ‘운동(책·음악·그림·영화·연애…)’이 있었어요. 이미 존재하고 있던 강렬한 ‘운동’ 때문에 철학이라는 ‘어둠’은 이내 강렬한 ‘빛(깨달음!)’이 되었죠. 이처럼 ‘침묵’도 ‘어둠’도 어떤 배치안에서 ‘실재 운동’이 돼요. 이는 ‘운동’하지 않음으로 촉발되는 강렬한 ‘운동’이죠.
‘소중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침묵’과 ‘어둠’으로 우리네 삶을 더 기쁘게 하는 ‘운동’을 촉발하는 사람일 거예요. ‘좋은 사람’이 된다는 건 어떤 걸까요? ‘침묵’과 ‘어둠’으로서 한 사람에게 더 기쁜 ‘운동’을 선물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의미할 거예요. 잘 산다는 건 어떤 걸까요? ‘실재 운동’을 깨달아서 ‘소중한 사람’과 함께 하며 매일 조금씩 ‘좋은 사람’이 되는 걸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