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와 물질은 하나의 움직이는 연속성이다.
세계나 (세계 속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은 모두 ‘운동(진동)’이죠. 존재가 ‘운동’하는 것이 아니라, ‘운동’ 자체가 존재이기 때문이죠. 그런데 우리는 그 ‘운동’을 포착할 수 없죠. 그 포착할 수 없는 ‘운동’을 포착하기 위해서 ‘운동’을 고정하고 분할해서 ‘물질’화하는 거죠.
물질을 절대적으로 결정된 윤곽을 가진 독립적 물체로 분할하는 것은 모두 인위적 분할이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물질’은 모두 (어떤 결정된 윤곽도 없는) ‘운동(진동)’이지만, 우리는 이를 “절대적으로 결정된 윤곽을 가진 독립적 물체로 분할”하죠. 이것이 우리가 ‘운동’을 포착하는 방식이죠. 하지만 이는 모두 “인위적 분할”이에요. 있는 그대로(운동)를 보는 게 아니라 우리가 볼 수 있는 형태로 인위적으로 조작해서 보는 거예요. 그렇다면 있는 그대로, 즉 ‘운동’으로서 세계나 ‘물질’은 어떤 모습일까요?
하나의 움직이는 연속성이 주어져 있고, 거기서 모든 것이 변화하는 동시에 머문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있는 그대로의 세계는 “하나의 움직이는 연속성”이죠. “거기서 모든 것이 변하는 동시에 (있는 그대로) 머물”죠. 화살이 A 지점에서 B 지점으로 날아가는 것은 “하나의 움직이는 연속성”이죠. 이는 화살이 A 지점에서 B 지점으로 “변화하는 동시에” A 지점과 B 지점에 “동시에 머무는” 상태죠.
자연을 생각해 보세요. 자연은 그 자체로 하나의 힘이죠. “하나의 움직이는 연속성”을 가능케 하는 힘(운동)이죠. 그 힘(운동)에 의해서 매일 해가 뜨고 지고, 때가 되면 계절이 바뀌고, 만물이 생성되었다가 소멸하죠. “모든 것이 변화하는 동시에 (있는 그대로) 머문다” 이는 모순이 아니라 진실이죠. 세계(자연)라는 것은 “하나의 움직이는 연속성” 즉 ‘운동’이고, 이 ‘운동’을 통해 세상 만물(자연물)이 끊임없이 생성-소멸하며 변화하니까요.
바다와 파도
어째서 우리는 마치 만화경을 돌렸을 때처럼 전체가 변화했다는 것을 확인하지 못하는가? 왜 우리는 전체의 운동성 속에서 움직이는 물체들이 따르는 궤적만을 찾으려 하는가?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물질’을 본다는 건, 매 순간 “만화경을 돌렸을 때처럼 전체가 변화”하는 상태인 거예요. 사과 하나를 본다는 건, 사과와 관련된 전체(흙·나무·햇살·비·농부…)가 변화하는 상태를 보는 거죠. 그런데 “우리는 전체 운동성”을 보지 못하고, 그 “운동성 속에서 움직이는 물체(사과)들이 따르는 궤적만을 찾으려” 하죠. 쉽게 말해, 사과 하나의 움직임만 보죠. 우리는 왜 이렇게 세계를 보게 된 것일까요?
우리가 영원성과 변화라는 두 항을 분리한 후, 물체들로 영원성을 나타내고, 공간 속의 동질적인 운동들로 변화를 나타내는 것은 어디서 유래하는가?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사과를 볼 때, 사과와 관계된 “전체 운동성”을 보지 못하고 사과 하나의 궤적만을 따르려는 건, ‘영원’과 ‘변화’를 구분해서 보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이에요. 즉 “영원성과 변화”라는 원래 하나인 “전체 운동성”을 보지 못하고, 그 “두 항을 분리”하기 때문이죠. 이는 ‘바다’와 ‘파도’의 관계로 설명할 수 있어요.
바다’는 ‘영원성(동일성)’을 상징하고, ‘파도’는 ‘변화(차이성)’를 상징하잖아요. 즉 ‘바다에서 “영원성”을 보고, ‘파도’라는 “운동들로 변화”를 보잖아요. 그런데 ‘바다’(영원성)와 ‘파도’(변화)는 분리된 상태가 아니잖아요. ‘바다(자연)-파도(자연물)’는 그 자체로 이미 하나인 상태죠. 하지만 우리는 ‘바다(자연)’와 ‘파도(자연물)’를 구분해서 보기 때문에 그 자체로 하나인 “전체 운동성”을 보지 못하게 된 거죠.
있는 그대로의 세계(하나의 움직이는 연속성)는 절대 변하지 않는 ‘영원성(동일성)’을 갖고 있는 동시에 끊임없이 흘러가는 ‘변화성(차이성)’을 갖고 있어요. 우리는 이 역설적인 ‘운동(자연)’을 볼 수 없어서 “전체의 운동성(바다) 속에서 움직이는 물체(파도)들이 따르는 궤적만을 찾으려” 하는 거죠. 활짝 핀 꽃을 볼 때, ‘자연’이라는 그 자체로 전체인 “하나의 움직이는 연속성”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저 바람에 흩날리고 있는 꽃 한 송(자연물)만을 보는 것처럼 말이에요.
생존, ‘운동’을 ‘물질’화시키는 이유
모든 생명체는 하나의 세계(실재 운동)를 “영원성과 변화라는 두 항”으로 분리하죠. 이를 통해 생명체는 ‘실재 운동’을 “절대적으로 결정된 윤곽을 가진 독립적 물체로 분할”해서 보게 되는 거예요. 이것이 모든 생명체가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지각’하는 방식이에요. 생명체의 이러한 경향은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요?
생명체 중 가장 하등의 것에서도 영양 섭취는 탐색과 접촉, 마지막으로 한 중심으로 수렴하는 일련의 노력을 요구한다. 그 중심은 바로 영양분으로 사용되어야 하는 독립적 대상이 될 것이다. 물질의 본성이 무엇이건, 생명은 이미 거기에 첫 번째 불연속성을 세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세계(전체)도 ‘물질’(부분)도 모두 ‘운동(진동)’이죠. 모든 것들이 다 연결되어 떨리고 있는 상태죠. 그런데 생명체가 이 ‘운동’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유익은커녕 생존조차 어려워질 거예요. 모든 생명체는 세계 속에서 영양분(먹이)을 섭취하기 위해 “탐색과 접촉”해야 하는 일련의 노력이 필요하죠. 바로 이 노력이 생명체가 ‘운동’을 고정하고 분할해서 ‘물질’로 파악하게 되는 이유인 거예요. ‘운동’은 테두리가 없기 때문에 명확하게 포착하기 어렵고, ‘물질’은 테두리가 있기 때문에 명확하게 포착하기 용이하니까요.
“생명은 이미 거기에 첫 번째 불연속성을 세우게” 되는 거예요. 생명체는 모든 것이 연결되어 ‘진동(운동)’ 중인 ‘영원성’의 세계에 살죠. 그 세계에서 영양분 섭취라는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변화’를 고정하고 분할하는 거죠. 말하자면, 흐릿한 세계(운동) 속에서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영양분)에 초점을 잡는 거예요. 생명이 세우는 최초의 불연속성은 (모든 것이 연결되어 동시에 떨리고 있는 흐릿한) 세계를 조각난 상태로 분할하고 고정시켜서 초점을 잡는 일인 거죠.
필요는 기존 신체를 벗어나게 하고 다음 신체를 찾게 한다.
그렇다면 그 최초의 분할(불연속) 이후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달리 말해, 처음으로 초점을 잡았던 삶 이후에는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까요?
그러나 영양 섭취의 욕구가 유일한 욕구는 아니다. 그것 주위에 다른 욕구들이 조직되는데, 이것들은 모두 개체나 종의 보전을 목적으로 한다. 그런데 그 욕구들 각각은 우리가 우리 신체 옆에서 그것과 독립된, 그리고 우리가 찾아 나서거나 피해야만 하는 대상들을 구별하도록 이끈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모든 생명체에게 “영양 섭취의 욕구”가 있죠. 하지만 그것이 유일한 욕구는 아니잖아요. 영양 섭취의 욕구 “주위에 다른 욕구들이 조직되고, 이는 모두 개체나 종의 보전을 목적”으로 하죠. 그리고 “그 욕구들 각각은 … 우리가 찾거나 피해야만 하는 대상들을 구별하도록” 만들어주죠.
예를 들어 볼게요. 자다가 눈을 떴는데, 누군가 여러분 얼굴에 비닐을 씌운 거예요. 숨이 안 쉬어지겠죠? 그럼 세상에서 뭐만 보이겠어요? 공기만 보이겠죠. 다른 것은 안 보여요. 공기가 지금 절대적으로 필요하니까요. 그러다 어렵게 비닐을 찢어서 숨을 쉬었다고 해봐요. 이제 뭐가 보이겠어요? 생존을 위해서 물을 찾겠죠. 물을 마신 다음에는 초점이 어디로 향하겠어요? 밥이겠죠. 이제 그것마저 해결됐다면 섹스를 하고 싶을 거예요. 섹스를 마음껏 한 이후에는 영화가 보고 싶어질 거예요.
이렇게 최초의 분리 이후 생겨나는 연속적인 욕구에 의해 다음 분할들이 계속 생겨나는 거예요. 이 과정이 우리가 “찾아 나서거나 피해야만 하는 대상들을 구별”하는 과정이잖아요. 비닐이 씌워졌을 때는 많은 대상 중 공기를 찾아 나서야 하죠(동시에 공기 아닌 것은 피해야만 하죠). 그다음에는 물, 밥, 섹스, 영화를 순차적으로 찾아 나서게 되잖아요.
욕구는 ‘빛다발’이다.
따라서 우리의 욕구는 감각적 성질들의 연속성으로 향하면서 거기서 구분되는 대상들을 그려내는 그만큼의 빛다발들이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우리의 욕구”라는 것은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구분되는 대상들을 그려내는 빛다발”인 거죠. 그런데 우리의 ‘욕구(필요)’는 고정되어 있지 않죠. 자신을 적절하게 보존하기 위한 ‘욕구’는 계속 변해요. 즉 “우리의 욕구는 감각적 성질들의 연속성을” 향하죠. 세계(공기·물·음식·섹스·영화…) 속에서 각자의 ‘욕구’에 의해 감각은 계속 연속되잖아요. 공기가 필요할 때 공기를, 물이 필요할 때는 물을 감각하는 상태로 끊임없이 이어지잖아요.
‘욕구’라는 것은 그 변화하는 감각을 통해 “구분되는 대상을 그려내는 빛다발”인 거죠. 연속된 세상(운동)은 다 뿌옇고 흐릿한 세상이에요. 그런데 우리가 삶에 어떤 필요성을 느낄 때, 그것은 ‘빛다발(고정·분할)’이 돼요. 쉽게 말해, ‘욕구’의 대상을 선명하게 보이게 만드는 ‘빛다발’인 거죠.
이 빛다발은 ‘욕구’에 맞게 구별되는 대상들을 그려내고 동시에 그에 적합한 신체 역시 그려내죠. 공기가 필요할 때는 흐릿한 세계(운동) 속에서 공기(물질)에만 빛을 비춰서 호흡하는 신체를 그려내죠. 물·음식·섹스·영화가 필요할 때 그것들에만 빛다발을 비춰서 그에 합당한 신체를 그려내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