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재 ‘운동’은 어떻게 드러나는가?
‘나’와 ‘너’, ‘우리’ 그리고 ‘세계’도 모두 ‘궤적’이 아닌 ‘운동’이죠. 하지만 우리는 좀처럼 이 ‘운동’을 보지 못하죠. 왜 그럴까요? 우리의 감각이 왜곡되어 있기 때문이에요. ‘운동’을 ‘궤적’으로 보는 왜곡된 감각 말이에요. 영화를 생각해 봐요. 영화를 볼 때 우리는 역동적인 ‘영상’을 보죠. 하지만 이는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게 아니죠. 실재 우리가 보는 건, ‘사진' 즉, 이미지(상!)이잖아요. 그 ‘사진’이 너무 빨리 교체되기 때문에 ‘영상’처럼 보이는 것뿐이죠.
영화(상의 연결)를 ‘영상(허상)’으로 보는 건 우리의 감각이 왜곡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거죠. 이처럼 우리의 감각은 왜곡되어 있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상)의 세계를 보지 못해요. 그러니 우리의 감각이 제대로 작동할 때, ‘운동’ 즉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볼 수 있게 되겠죠. 이에 대해 베르그손은 이렇게 말해요.
감각은 그 자체로 내버려두면 실재하는 두 정지 사이에 확고하고 불가분한 전체로서의 실재적 운동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있는 그대로’의 세계(운동)는 왜곡된 감각이 아닌 “감각을 그 자체로 내버려두게” 되는 상태에서만 드러나겠죠. 이 상태가 되면, “실재하는 두 정지 사이에 확고하고 불가분한 전체로서의 실재적 운동”이 드러나게 돼요. 우리는 팔이 A 지점에서 B 지점으로 옮겨 가는 상황을 볼 수 있죠. 이는 감각을 그 자체로 내려둔 상태로 보는 게 아니에요. 왜곡된 감각으로 보는 거예요. ‘사진(점)’을 연결해서 ‘영상(궤적)’처럼 보는 거죠.
그런데 이 상황(A→B)을 감각 그 자체로 볼 수 있다면, ‘운동’을 볼 수 있겠죠. 두 정지 지점의 연결(궤적)이 아니라 결코 나눌 수 없는 전체로서 ‘운동(지속)’ 말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이 ‘운동’이 무엇인지 도저히 가늠할 수 없죠. 우리는 왜곡된 감각으로 세계를 봐 왔으니까요. 그러니 ‘있는 그대로’의 세계, ‘운동’를 무엇인지 알려면, 먼저 우리의 왜곡된 감각부터 알아봐야 할 거예요.
‘분할’은 상상력의 작품이다.
분할은 상상력의 작품이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왜곡된 감각은 ‘분할’이죠. 이는 명백히 ‘운동(상의 연결)’ 중인 세계를 고정된 점들의 연합으로 보려는 ‘분할’이죠. 이 ‘분할’ 때문에 왜곡된 감각이 생기는 거예요. 베르그손은 이러한 “분할은 상상력의 작품이라고 말하죠. 즉, 우리가 ‘운동’을 ‘분할(한정·고정)’처럼 보게 되는 건 우리의 상상력 때문이에요. 쉽게 말해, 우리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게 아니라 ‘그럴 것’이라고 상상하는 상태로 보는 거죠.
‘있는 그대로’의 세계(상)는 끊임없이 ‘운동’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볼 수 없죠. 역설적이지만, 바로 그래서 우리는 ‘분할’하는 거예요. 볼 수 없는 ‘운동(있는 그대로의 세계)’을 보기 위해 상상력으로 그 ‘운동’을 ‘분할’하는 거예요. 마치 반쯤 찢어진 그림을 보며 나머지 부분을 상상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에요.
‘운동’을 ‘분할’해서 파악하는 현상은 인간의 조건 같은 거예요. 이는 인간이 세계를 감각하는 조건이죠. 인간은 ‘운동’을 볼 수 없기에 그 ‘운동’을 ‘분할’해서 보는 거죠. 우리가 (‘운동’은 볼 수 없고) ‘운동’처럼 보는 ‘궤적’은 ‘유사 운동’인 거죠. 그것은 사실상 ‘분할’의 연결일 뿐이니까요. 만약 우리가 인간적 감각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감각하면 어떻게 될까요? 즉, “감각을 그 자체로 내버려”둘 수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영화를 볼 수 없을 거예요. 영화는 1초에 24개의 프레임이 지나가는 거잖아요. 그 프레임이 너무 빠르게 지나가기 때문에 그 고정된 장면(점)을 인지할 수 없어서 ‘유사 운동’(궤적)으로 보이는 거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실제로 ‘감각’하게 되면 영화를 ‘영상’처럼 보지 못하고, 1초에 24개로 나열되는 사진(점)만 보게 될 거예요. 인간은 ‘운동(지속)’을 ‘분할’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그것을 ‘유사 운동’(궤적)으로 감각할 수 있는 거죠.
‘분할’은 불가피한 오해다.
인간은 ‘운동’을 ‘분할’해서 점들의 연합(‘궤적’)으로 파악해요. 이 때문에 삶에서 이런저런 문제가 생기기도 하지만 이는 불가피한 측면도 있어요. ‘운동’을 ‘분할’해서 ‘궤적’으로 보는 건, 인간의 실존적 한계 같은 거예요. 쉽게 말해, ‘분할’은 인간에게 불가피한 ‘오해’ 같은 거예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소설가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해봐요. 어제는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다가 오늘 또 갑자기 찬 바람이 쌩쌩 부는 거예요.
우리는 ‘지속’인 그(‘운동’)를 볼 수 없죠. 하지만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의 존재 자체(‘운동’)를 알고(보고) 싶잖아요. 그때 우리는 ‘상상력’을 동원해 그를 ‘오해’하는 형태로 그를 ‘분할(점)’해서 파악할 수밖에 없어요. ‘글이 잘 써지는 날은 사랑스러운 눈빛이고, 글이 안 써지는 날은 찬 바람이 쌩쌩 부는 날인가?’ 이는 그의 ‘운동’을 볼 수 없어서 ‘상상력’으로 그의 ‘운동’을 점으로 ‘분할(고정·한정)’한 거죠.
하지만 이는 ‘오해’죠. 종잡을 수 없는 끊임없는 변덕(운동)을 이해하기 위해서 ‘오해’(분할)한 거죠. 이처럼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상상력’으로 세계(운동)를 ‘분할’해서 파악할 수밖에 없어요. 있는 그대로의 세계(운동)는 우리에게 주어진 감각으로는 볼 수 없으니까요. 이제 그 ‘상상력’의 역할이 무엇인지 알 수 있죠.
그 상상력의 역할은 바로 밤에 번개 치는 장면을 밝히는 순간적인 섬광처럼, 우리의 일상적 경험의 움직이는 상들을 고정하는 것이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세계는 몽환적이다.
‘상상력’은 칠흑 같은 밤의 번개 같은 거예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을 찰나에 밝히는 섬광 같은 거죠. 그 섬광으로 “일상적 경험의 움직이는 상들을 고정”할 수 있는 거죠. 어두운 밤에도 세상은 계속 ‘운동’하지만 우리는 그 ‘운동’을 볼 수 없잖아요. 오직 번개가 치는 그 순간(분할)에만 보게 되죠. 이는 어두운 클럽에서 모두 춤(운동)을 추고 있지만, 우리는 그 춤(운동) 전체를 볼 수 없고, 조명이 번쩍이는 순간의 연속만 보게 되는 것과 유사할 거예요. 이것이 “일상적 경험의 움직이는 상들을 고정”한다는 것의 의미예요.
세계는 ‘운동(지속)’이지만, 우리는 ‘상상력’을 통해 그것을 ‘분할(점)’하고, 그 ‘분할(점)’들을 연결하는 형태로 ‘유사 운동(궤적)’을 파악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보는 세계라는 것은 분명하고 선명한 세계이기보다 모호하고 몽환적인 세계에 가까울 거예요. 마치 어두운 클럽에서 섬광처럼 반짝이는 조명 아래서 춤을 추는 사람이 몽환적으로 보이는 것처럼 말이에요. 우리가 세계를 분명하고 선명하다고 느끼는 건, 평생을 ‘클럽’에서만 살아서 그런 거죠. 그래서 어둠 속에서 찰나의 섬광으로 보는 세계에 너무 익숙해져서 그런 거죠.
연속적인 점들은 결국 상상적 머묾에 불과하다. 당신은 경로를 궤적으로 대체한다. … 그러나 어떻게 진행이 사물과 일치하며, 운동이 부동성과 일치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우리가 ‘운동’이라고 여기는 것들은 모두 “연속적인 점”들의 연합이고, 이는 “결국 상상적 머묾에 불과”한 것이죠. 어떤 ‘운동’하는 존재가 움직여가는 여정(흐름)인 “경로를 (점들의 연합인) 궤적으로 대체”하는 것일 뿐이죠. 그런데 우리가 ‘운동’을 ‘궤적’으로 아무리 대체한다고 하더라도, 그래서 ‘궤적’을 ‘운동’처럼 볼 수 있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진행(운동)’ 중인 상태가 고정된 ‘사물(궤적)’로 일치되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죠. 이는 “운동이 부동성과 일치”한다고 말하는 것만큼 부당한 이야기니까요. 결국 ‘운동’하는 것은 ‘운동’하는 것이고, 멈춰 있는 것은 멈춰 있는 것일 뿐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