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정과 균형
‘주의’ 깊은 ‘생각’을 위한 ‘몸’의 중요한 역할이 하나 더 있어요. 혼란해서 이곳저곳 두리번거리는 “정신에 무게 추”를 달아주는 일이죠. 쉽게 말해, ‘몸’이 산만한 “정신을 고정”해야 하는 거죠. 그래야 지금 당면한 상황 속에서 적절한 ‘결정’을 내릴 수 있으니까요.
정신의 정상적인 작업에서 모든 것은 꼭짓점에 의해 거꾸로 서 있는 피라미드처럼 감각과 운동의 응집력에 달려 있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정신의 정상적인(건강한) 작업”은 뭘까요? “거꾸로 서 있는 피라미드”를 하나 생각해 봐요. 이때 피라미드 무게 전체가 밑면의 하나의 꼭짓점에 쏠리면서 “감각과 운동(몸)의 응집력”이 발생하게 되겠죠. 이 응집력(몸)이 특정한 행동(결정)인 거죠. 이것이 우리의 정신이 건강하게 작동하는 모습이에요. ‘몸’이 “정신에 무게 추”를 달아 행동(결정)을 촉발하게 되는 모습이 “정신의 정상적인 작업”인 거죠.
그런데 이것으로 충분한 걸까요? 쉽게 말해, “거꾸로 서 있는 피라미드”가 한 점으로 모여 행동(결정)을 촉발하기만 하면, “정신의 정상적인 작업”인 걸까요? 그렇지 않죠. 여기에는 “정신의 무게 추”는 있지만, “균형”이 빠져 있죠. ‘몸’이 “정신에 무게 추”를 달았지만, 엉뚱한 곳에 점을 찍었다고 해봐요. 이는 어떤 ‘결정’을 내리지만, 그 ‘결정’이 잘못된 ‘결정’인 경우죠. 성급하게 퇴사해서 직장을 다닐 때보다 더 불행한 삶이 되는 경우, 혹은 성급하게 이별을 해서 후회하게 되는 경우가 대표적으로 이런 경우죠. 이는 얼마나 부‘주의’한 삶인가요?
‘주의’ 깊게 ‘생각’하며 산다는 건, 단지 “정신에 무게 추”를 달아 ‘순수 기억’에서 ‘습관 기억’으로 떨어지기만 해서는 되는 일이 아니에요. ‘순수 기억’에서 ‘습관 기억’으로 떨어지는(기억의 상하 운동) 동시에 ‘상 기억’들이 회전(기억의 회전운동)하면서 가장 유익한 퇴사 방법이 무엇인지 찾을 수 있어야 하죠. 이는 ‘균형’을 잡는 일이죠. ‘균형’은 오직 ‘회전’하면서만 잡을 수 있으니까요.
‘균형’ 잡힌 삶이란 ‘주의’ 깊게 ‘생각’하며 사는 삶을 말하는 거죠. 이 ‘균형’은 구체적으로 어떤 걸까요? 자신이 직장에 환멸을 느꼈던 이유는 단순한 직장 생활이 주는 불편·불쾌함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삶을 찾지도, 살지도 못하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주의’를 기울여 ‘생각’하는 일이죠. 또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삶을 찾았다면, 그 일을 하기 위해 직장을 얼마간 더 다니거나 혹은 이직을 준비하는 방법을 ‘주의’를 기울여 ‘생각’하는 일이죠. 이런 ‘주의’ 깊은 ‘생각’이 “정신에 균형”을 주는 일인 거죠.
팽이가 그리는 아름다운 삶
‘삶에 대한 주의’는 가장 먼저 ‘몸’에 집중하는 거예요. ‘몸’의 ‘감각’과 ‘운동’을 따르는 거죠. 하지만 단순히 ‘감각’과 ‘운동’만으로 산다면 그것은 동물적 삶일 뿐, 인간적 삶이라고 말할 수는 없죠. ‘삶에 대한 주의’는 항상 움직이느라 혼란한 “정신에 무게 추” 주어서 “균형”을 잡는 일인 거죠. 그렇게 ‘정신’이 과도하게 흔들리지 않게 고정하는 거예요. 이는 비유하자면 팽이와 비슷할 거예요.
어떤 평면(세계) 위에서 팽이가 회전하고 있다고 해봐요. 그 팽이의 모든 힘은 아래 꼭짓점(신체)에 응축되어 회전하겠죠, 하지만 그 팽이는 자신의 회전력에 의해 상하좌우로 조금씩 이동하게 되잖아요. 우리는 그 팽이 같은 거예요. ‘순수 기억’에서 ‘습관 기억’으로 내려가는 운동을 통해 세계 속에서 어떤 결정(행동)을 하게 되고, 동시에 그 회전력을 통해 세계 어느 지점으로 무게 중심을 계속 옮기게 되죠.
이때 아래로 향하는 “무게 추”가 충분치 않아서 응축하는 운동이 점점 약해진다면 팽이는 곧 쓰러지겠죠. 이는 ‘삶에 대한 주의’가 없는 상태죠. 회사를 왜 다녀야 하는지 ‘주의’ 깊게 ‘생각’하지 않다가 삶이 쓰러지게 되는 경우가 이런 상태죠. 또 만약 팽이가 힘차게 돌기만 할 뿐, 자신이 어디로 움직이는지 알지도 못한 채 그저 표류한다면 그 역시 ‘삶에 대한 주의’가 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거예요. 이는 회사를 성급하게 그만두고 이런저런 일을 전전하면서 방황하는 삶에 빠지게 되는 상태겠죠.
‘삶에 대한 주의’는 우리(팽이)가 ‘순수 기억’에서 ‘습관 기억’(꼭짓점)으로 모든 힘을 응축하여 세계(평면)에 흔적을 남기는 거예요. 또한 동시에 그 흔적이 우리가 원하는 아름다운 그림이 되게끔 스스로 ‘균형’을 잡아 가는 거예요. ‘나’의 행동으로 ‘나’의 세계를 만들어가고, 그 세계가 진정으로 내가 원하는 세계가 되도록 애를 쓰는 삶. 이것이 ‘삶에 대한 주의’를 기울이며 살아가는 모습인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