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깊게 ‘생각’하는 삶
삶에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은 ‘결정(행동)’에만 관계한 것이 아니죠. 더 근본적으로 ‘생각(사유)’에 관계하죠. 적절한 ‘결정’을 하려면 ‘주의’ 깊게 ‘생각’할 수 있어야 하니까요. 즉 삶에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은 ‘주의’ 깊게 ‘생각’한다는 의미이기도 한 거죠. ‘주의’ 깊게 ‘생각’하는 건 어떤 걸까요? 베르그손의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지적인 작업, 어떤 개념을 형성하거나 다소 일반적인 관념을 다수의 기억으로부터 추출 해내는 것이 문제인가? 커다란 여백이 한족으로 공상에, 다른 쪽으로는 논리적 판별에 남을 것이다. 그러나 관념이 존속할 수 있으려면, 어느 면에서건 현재의 실재성에 접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즉 정신에 의해 표상되는 동시에 정도를 더해가며, 그리고 자신의 점진적인 감소나 응축에 의해서, 많건 적건 몸에 의해 작동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주의’ 깊은 ‘생각’은 ‘공상’이 아니죠. 방 안에 누워서 ‘이거 하면 좋을 텐데, 저거 하면 좋을 텐데’ 이런 ‘공상’은 ‘주의’ 깊게 ‘생각’하는 게 아니잖아요. 이런 허황된(무논리) ‘공상’의 반대편에 ‘논리적 판별’이 있죠. 책을 읽으면서 ‘이것은 비약이네, 이건 성급한 일반화네’라고 생각하는 거 있잖아요. 베르그손은 이러한 ‘논리적 판별’ 역시 ‘주의’ 깊은 ‘생각’이 아니라고 말해요.
우리의 정신은 ‘공상’이나 ‘논리적 판별’을 할 수 있죠. 또한 이런 ‘공상’이나 ‘논리적 판별’은 “정신에 의해 표상되는 동시에 정도를 더해갈” 수도 있죠. 한번 표상된 ‘공상’이나 ‘논리적 판별’은 점점 더 큰 ‘공상’이 되거나 더 확장된 ‘논리’로 전개될 수 있잖아요. 하지만 이런 ‘공상’과 ‘논리적 판별’이 아무리 그 정도를 더해간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주의’ 깊은 ‘생각’이 될 수는 없어요.
‘주의’ 깊은 ‘생각’은 어떤 “지적인 작업”이고, “어떤 개념을 형성하거나 일반 관념을 추출 해내는” 일이죠. 이는 온전히 ‘정신(성격·기억)’적인 작업일까요? 그렇지 않죠. 이것이 실질적으로 가능해지면 “현재의 실재성에 접하고 있어야” 해요. ‘현재의 실재성’은 뭘까요? 바로 몸이죠.
어떤 생각이 ‘주의’ 깊은 ‘생각’이 되려면, (‘성격’과 ‘기억’ 외에) “많건 적건 몸에 의해 작동될 수 있어야” 하죠. 쉽게 말해, 방 안에 누워서 ‘공상’을 하더라도, 그 ‘공상’을 ‘몸’을 통해 현실 세계 속에서 실현해 보려 해야 한다는 거죠. 또 책을 읽고 ‘논리적 판별’을 하더라도, 그 ‘논리적 판별’을 ‘몸’을 통해 현실 세계 속에서 검증해 보아야 한다는 거죠. 그것이 ‘주의’ 깊게 ‘생각’하는 삶인 거죠.
‘삶에 대한 주의’는 ‘몸’에 있다.
따라서, 우리의 몸은 한편으로는 그것이 받아들이는 감각과 다른 편으로는 그것이 수행할 수 있는 운동과 더불어 분명 우리의 정신을 고정하는 것이다. 즉 정신에 무게 추와 균형을 주는 것이다. 그런 감각과 운동은 삶에 대한 주의라 불릴 수 있는 것을 조건 짓는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삶에 대한 주의’의 핵심은 ‘몸’에 있어요. ‘몸’은 ‘감각’과 ‘운동’의 중심이죠. ‘몸’은 한편으로 외부 대상이 촉발하는 ‘감각’을 받아들이고, 또 한편으로는 그 수용된 ‘감각’에 적절히 반응할 수 있는 ‘운동’을 하죠. 그런데 이 ‘감각’과 ‘운동’만으로 ‘삶에 대한 주의’가 완성된다고 말할 수 없어요. ‘주의’를 하려면 우리에게 꼭 필요한 대상 쪽으로 “우리의 정신을 고정”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죠.
쉽게 말해, 우리의 ‘몸’이 아무리 잘 ‘감각’하고 ‘운동’한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정신’이 (‘주의’의 대상에게) 고정되지 않고 산만하다면 ‘주의’ 깊은 ‘생각’은 요원하잖아요. 그러니 ‘감각’과 ‘운동’ 외에 ‘주의’ 깊은 ‘생각’을 위한 ‘몸’의 역할이 하나 있죠. 끊임없이 움직이느라 혼란한 “정신에 무게 추와 균형을 주는” 역할이죠.
직장 생활에 환멸을 느끼는 상황을 생각해 봐요. 이때 ‘삶에 대한 주의’는 어떻게 하는 걸까요? 자신의 ‘기억’이 ‘성격’ 속에서 조직화 되어야겠죠. 그리고 몸을 통해 직장이 주는 ‘감각’(환멸)과 그에 대응하는 ‘운동’(취미·여행·이직·퇴사·사업…)을 적절하게 할 수 있어야겠죠. 즉 어떤 ‘결정’을 내릴 수 있어야 하는 거죠. 직장에서 심각한 환멸을 느끼면서도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하고 참고 견디는 건 ‘삶에 대한 주의’가 아니죠.
그런데 이때 ‘몸’의 두 기능(감각·운동)으로만 내린 결정은 적절한 ‘결정’이 아닐 수 있죠. ‘정신’이 산만해서 이곳저곳 두리번거리는 상태라면, (‘몸’이 아무리 잘 ‘감각’하고 ‘운동’한다고 해도) 그때 내린 ‘결정’은 잘못된 ‘결정’일 수밖에 없죠. 성급한 퇴사나 도피성 취미 혹은 여행 같은 ‘결정’이 이러한 잘못된 ‘결정’의 대표적인 사례일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