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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흐르는 음악처럼 볼 수 있다면

‘정신’과 ‘신체’의 결합 문제


‘정신’과 ‘신체’가 아무리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베르그손은 이원론자예요. 즉 ‘정신’과 ‘신체’가 별도로 존재한다고 여기죠. 그렇다면 이제 하나의 문제가 발생하죠. 그 문제는 바로 “영혼(정신)과 육체의 결합 문제”죠.


그 문제란 다름 아닌 영혼과 육체의 결합 문제이다. 우리는 물질과 정신을 철저히 구별했기 때문에 그것은 우리에게 첨예한 형태로 제기된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베르그손은 “물질(신체)과 정신(영혼)을 철저히 구별”했잖아요. 이 때문에 ‘영혼(정신)과 육체(물질)가 어떻게 결합 되는가?’라는 질문은 매우 “첨예한 형태로 제기”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우리에게 ‘정신’과 ‘신체’가 별도로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반드시 어떤 형태로든 결합 된 상태로 있을 수밖에 없잖아요. ‘정신’적으로만 혹은 ‘신체’적으로만 사는 사람은 존재할 수 없으니까요. 그러니 베르그손이 이원론을 견지한다면, ‘정신’과 ‘육체’가 어떻게 결합 되는지를 규명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가 되는 거죠. 베르그손은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 ‘운동’에 대해서 이야기해요.


‘운동’은 무엇일까요? 베르그손은 먼저 ‘운동’에 대한 오해를 이야기해요. 세상 사람들은 ‘운동’을 일종의 ‘궤적’(점들의 집합)으로 보는 경향이 있죠. 내 손이 A 지점에서 B 지점으로 움직인다고 생각해 봅시다. 손이 ‘운동’한 거잖아요. 우리는 이 ‘운동’을 마치 A와 B 사이에 있는 무한한 점들을 연결한 ‘궤적’처럼 생각해요. 분리된 점들의 연결이라고 생각한다는 거예요. 쉽게 말해, A와 B 사이의 무한한 모든 점들을 연결하면 손의 ‘운동’이 된다는 거죠. ‘운동’은 그런 게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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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은 나눌 수 없다.


모든 운동은 정지에서 정지로의 이행인 한에서 절대적으로 불가분적이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운동’은 ‘지속’(경로·흐름)이지 ‘궤적’(점들의 집합)이 아니에요. ‘운동’은 ‘지속’이고 흐름이기 때문에 (아무리 짧게 나누었다고 하더라도) 점으로 분할 불가능해요. “모든 운동은 절대적으로 불가분적” 즉 나눌 수가 없는 상태인 거죠.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상태를 좀처럼 파악하기 어렵죠. 왜냐하면 우리의 시각(감각)은 ‘운동’이 아닌 ‘궤적’으로 보는 데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죠.


나의 시각은 운동을 지나간 선분 AB의 형태로 지각하고, 그 선분은 모든 공간과 마찬가지로 무한히 분할될 수 있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우리 역시 ‘운동’을 공간적 자취(궤적)로 인식하려는 경향이 있죠. 우리는 A에서 B까지 가는 ‘운동’을 마치 선분처럼 생각하잖아요. 손이 A에서 B로 움직였을 때, 우리의 시각은 그것을 선분 AB로 지각하잖아요. 그래서 “그 선분은 모든 공간과 마찬가지로 무한히 분할될 수” 있는 것으로 파악하죠. 하지만 ‘운동’은 흐름, ‘becoming’ 그 자체예요. 분절된 ‘being’이 아니에요. ‘선분’은 무한히 나눌 수 있지만 ‘운동’은 나눌 수 없어요. 나눌 수 있다면, 그것은 ‘선분’이지 ‘운동’일 수 없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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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에 관한 선입관


모든 선입관을 멀리하면 나는 곧바로 나에게는 아무 선택이 없고, 나의 시각 자체가 A에서 B로의 운동을 불가분의 전체로 파악하며, 그것이 무언가를 나눈다면 그것은 지나간 것으로 가정되는 선분이지, 그것이 지나가는 운동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손이 A에서 B로 이동하는 것을 선분 AB로 지각하는 것은 일종의 선입관이에요. 이는 인간 인식의 한계가 촉발한 선입관이거나 혹은 근대과학적 인식이 촉발한 선입관이겠죠. 하지만 이러한 “모든 선입관을 멀리하면 곧바로 나의 시각 자체가 A에서 B로의 운동을 불가분의 전체로 파악”할 수 있게 돼요. 만약 우리가 “무언가를 나눈다면 그것은 지나간 것으로 가정되는 선분이지, 그것이 지나가는 운동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되죠.


‘운동’은 어떤 형상일까요? 물줄기나 음악을 생각하면 돼요. 물줄기나 음악은 ‘궤적’이 아니라 ‘지속’(흐름)이죠. 흐르는 물을 아무리 짧게 나누고 그것을 연결한다고 해서 물줄기가 되는 건 아니잖아요. 물줄기는 흐름(운동) 그 자체니까요. 음악도 마찬가지잖아요. 한 음씩 분할하고 그것을 연결한다고 음악이 되는 게 아니잖아요. 아무리 짧은 단위로 분할하고 다시 그것을 이어 붙인다고 음악이 되는 게 아니잖아요. 음악(운동)은 흐름(선율!) 그 자체니까요.


지나감은 운동이고, 머묾은 부동성이다. 머묾은 운동을 중단하며, 지나감은 운동 자체와 하나이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운동’은 ‘지나감’ 그 자체에요. ‘머묾’은, 그것이 아무리 짧더라도 “운동을 중단”하죠. 이는 ‘부동성(비운동)’이기 때문에 결코 ‘운동’이 아니죠. 음악(물줄기)을 아무리 짧게 분할 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머묾’ 즉 ‘부동성’이기 때문에 ‘운동’(선율)이 아닌 거죠. 오직 ‘지속’적인 ‘지나감’만이 “운동 자체와 하나”인 거죠. 우리가 선분을 ‘운동’이라고 볼 수 없는 이유는 선분은 점(머묾)들, 즉 정지의 연합이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점들의 ‘궤적’을 ‘운동’이라고 보는 건 세계를 완전히 잘 못 보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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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을 진정으로 볼 수 없는 이유


우리는 ‘운동’의 진실을 못 봐요. 이 때문에 삶에서 문제가 발생하죠. 우리는 때로 곁에 있는 소중한 이를 제대로 보지 못하죠. 그래서 그에게 너무 쉽게, 너무 많은 상처를 주곤 하죠. 반대로 누군가 우리를 제대로 봐 주지 않아서 너무 쉽게, 너무 많은 상처를 받게 될 때가 있잖아요. 이런 일들은 ‘운동’의 진실을 보지 못해서 일어나는 일일 거예요. 한 사람을 진정으로 본다는 건 뭘까요? 그의 ‘궤적’을 보는 게 아니라 ‘운동’을 보는 거예요. 매 순간 변해가고 있는 그의 ‘운동’을 보는 거죠.


10년 전의 ‘황진규’와 10년 후인 지금의 ‘황진규’가 있다고 해봐요. 둘은 같은 사람인가요? 그렇지 않죠. 그 둘은 전혀 다른 사람이죠. 이건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도 있어요. 인간은 7~8년 주기로 세포 단위까지 모든 게 재생산돼요. 그러니까 최소한 7~8년이 흘렀다는 것은 물질적으로도 완벽히 다른 존재인 거예요.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이런 ‘운동’(흐름)을 볼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죠.


10년 전에 만났던 ‘황진규’를 10년 후인 지금 만났다고 해 봐요. 우리는 ‘부동’적인 ‘머묾(점)’을 볼 뿐, ‘운동’적인 ‘지나감’을 보지 못하죠. ‘얼굴에 주름이 생겼구나’, ‘차도 없이 걸어 다니는 것을 보니 이제 돈을 못 버는 모양이구나’ 등등 겉으로 드러나는 ‘점’들의 변화만 감지하는 거죠.


이는 ‘운동’이 아니라 ‘궤적’으로 파악하는 거죠. 즉 ‘황진규’라는 존재의 ‘운동’을 보는 것이 아니라, 공간적 자취, 즉 ‘점’들의 집합을 보는 거죠. 이는 10년 전, 9년 전, 8년 전, 7년 전 … 2년 전, 1년 전 그리고 지금의 ‘황진규’로 환원해서 보기 때문에 그래요. 그때그때의 ‘점’들의 변화만을 보게 되는 거죠. 하지만 ‘황진규’는 그런 존재가 아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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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너’라는 ‘운동’을 볼 수 있을 때 촉발되는 ‘운동’이다.


어떤 사람이든. 그 사람은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운동’하고 있는 존재잖아요. 세상 사람들은 이 ‘운동’의 진실을 못 보기 때문에 한 사람도 진정으로 볼 수 없는 거예요. 그러니 우리는 한 사람을 제대로 보고 싶다면, ‘선입관’을 없애려고 노력해야 해요. 그 ‘선입관’은 ‘부자들은 싸가지가 없다.’ ‘살찐 애들은 게으르다’와 같은 단순히 잘못된 정보 처리를 의미하는 게 아니에요. 그것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것이죠.


우리의 ‘선입관’ 중 가장 크고 견고한 것은 ‘운동’을 ‘궤적’으로 보는 일이죠. 한 사람을 진정으로 보는 것을 방해하는 ‘선입견’은 한 사람이라는 ‘운동’을 ‘궤적’으로 보는 일이죠. 그 ‘선입관’을 없애려고 애를 쓸 때, 비로소 한 사람을 진정으로 볼 수 있는 틈이 열릴 거예요. 그 틈 사이로 흘러가는 선율과 같은 그 사람의 모습을 보게 될 거예요.


그 모습이 ‘있는 그대로’의 한 사람(운동!)이죠. 그때 우리는 지난한 상처 넘어 진정한 ‘사랑’에 이를 수 있을 거예요. ‘사랑’은 한 사람이라는 ‘운동’을 볼 수 있을 때 촉발되는 매우 특별한 ‘운동’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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