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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역사 속 탈레스>

서양철학의 시작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개념이 있다. 바로 ‘본질’이다. 먼저 탈레스가 남긴 유명한 말부터 들어보자.


“탈레스는 만물의 근원을 물로 보았다.” 『그리스철학자 열전』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탈레스는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은 (설사 물이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모두 물이 변한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탈레스의 이런 관점은 중요하다. 탈레스의 명제가 참이기 때문이 아니다. 즉 세상 만물의 근원이 실제로 물이기 때문이 아니다. 세계의 근원이 정말 물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탈레스의 이 말이 형이상학적 사유, 즉 철학의 시작점이었다는 사실에 있다.


형이상학은 ‘본질’을 찾는 학문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본질’이 무엇인가? ‘존재의 이유’다. 이는 어려운 말이 아니다. 벤치, 소파, 책상 의자, 식탁 의자, 아기 의자 등등 세상에는 수많은 의자가 있다. 이 수많은 의자들의 ‘본질’은 무엇인가? ‘앉을 수 있음’이다. 앉을 수 없다면 의자로서 ‘존재의 이유’가 없다. 이처럼, 형이상학은 수많은 대상들 너머에 있으면서 그 대상들이 존재하게 되는 이유(본질)는 찾는 학문이다.


일찍이 탈레스가 “만물의 근원이 물이다”라고 말했을 때, 하나의 새로운 사유 방식을 보여준 것이다. 즉, 탈레스가 ‘본질’을 찾는 사유 방식인 형이상학으로서의 철학을 촉발한 셈이다. 철학책을 넘길 때 ‘본질’이란 단어가 수도 없이 나온다. 그것은 형이상학으로부터 시작된 (서양) 철학은 세상의 다양한 대상들 속에 존재하는 ‘본질’을 찾으려는 지난한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탈레스 이래의 수많은 서양 철학자들은 이 ‘본질’은 보편적이고 불변한 것이라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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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레스 이후의 걸출한 두 고대철학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이들 역시 세계의 ‘본질’을 찾으려고 애를 쓴 철학자였다. 둘의 차이가 있다면, 플라톤은 보편적이고 불변하는 ‘본질’을 세계 밖에서 찾으려 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세계 안에서 찾으려 했다는 점이다.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이라는 그림 속에서 플라톤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손바닥으로 땅을 가리키고 있다. 이는 플라톤은 세계의 ‘본질’이 세상 밖(천상)에 있다고 생각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이 세상 안(현실)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본질’을 탐구하는 형이상학은 분명 지혜를 준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되는 사실이 있다. 탈레스로부터 촉발된 형이상학은 지혜로부터 멀어지게 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탈레스의 ‘형이상학’은 후대에 이르면서 ‘본질’에 대한 집착으로 나아가는 경향이 생기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경향을 ‘본질주의’라고 한다. 이 ‘본질주의’는 두 가지 치명적 어리석음을 낳는다. ‘배타적 보수주의’와 ‘기만적 인간중심주의’가 그것이다.


‘배타적 보수주의’부터 이야기해 보자. 본질에 집착하는 이들은 기본적으로 ‘꼰대’가 될 개연성이 크다. 본질주의자에게 의자 하나가 주어졌다고 해보자. 그는 가장 먼저 의자의 ‘본질’을 찾을 테다. 그리고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의자의 본질, 즉 ‘앉을 수 있음’을 찾아낸다. 이런 본질주의자 앞에서 아이들이 의자 위에서 올라가 뛰어논다면 어떨까? 그는 아이들에게 호통을 칠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의자의 ‘본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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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질주의자는 꼰대 같은 ‘배타적 보수주의’가 되기 쉽다. 하지만 이는 얼마나 어리석은가? ‘본질’은 있다. 하지만 그 ‘본질’은 잠정적으로 고정된 것이지 불변하는 것이 아니다. 본질은 사후적으로 의미가 부여된 것일 뿐이다. 사람들이 오랜 시간 동안 의자에 앉았기에 의자의 본질이 ‘앉을 수 있는 어떤 것’으로 정해진 것일 뿐이다. 구두닦이의 작업실에서는 ‘신발을 올려놓을 수 있음’이 의자의 본질이니까 말이다.


‘본질주의’의 또 하나의 문제가 있다. ‘기만적 인간중심주의’다. 본질주의자는 본질을 찾는다. 하지만 그 본질은 전혀 보편적인 것이 아니다. 왜 그런가? 본질의 보편성은 엄밀히 말해, 인간이 보는 관점에서의 보편성이다. 자연에는 인간 이외에 수없이 많은 존재들이 있다. 동물, 식물, 바람, 파도 등등. 하지만 인간 이외에 그 어떤 존재도 본질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다. 오직 인간만이 본질을 탐구한다. 의자의 본질은 ‘앉을 수 있음’이다. 이것이 정말 보편적 본질인가? 아니다. 이는 세계를 인간중심의 측면으로 해석한 것일 뿐이다.


결국 ‘본질’의 보편성이란, 인간이라는 존재의 예외적이고 특수한 삶에서 파악한 범주를 통해서 파악한 세계의 질서일 뿐이다. 그러니 본질주의자들이 찾는 본질이 어찌 보편적이라 할 수 있을까. 이는 얼마나 기만적인가. 인간은 꽃을 꺾고, 소·돼지를 먹이로 사육하고, 끊임없이 자연을 파괴하면서 어떤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 중심적으로 파악한 본질을 완전히 내면화했기 때문 아닌가? 인간이 꺾기 위한 꽃! 인간이 먹기 위한 돼지·소! 인간의 편리를 위해 존재하는 자연! 그런 기만적인 인간중심주의는 이런 본질주의에서부터 잉태되었을 테다.


탈레스로부터 2000년이 훌쩍 넘었다. 지금은 ‘본질’의 본질을 물어야 할 시간이다. ‘본질’의 본질은 ‘유동’과 ‘다양’에 있다. ‘본질’은 사후적이기에 결코 불변하지 않으며(유동) 또한 그것은 지극히 인간 중심적이기에 결코 보편적이지 않다(다양). 역설적이게도, 본질주의자는 ‘본질’의 본질을 잘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인 셈이다. 형이상학은 양날의 검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통찰해 낼 수 있는 지혜로움을 얻을 수 있는 동시에, 언제든지 ‘배타적 보수주의’와 ‘기만적 인간중심주의’를 잉태할 수 있는 위험을 갖고 있다. 형이상학으로부터 시작된 철학은 아주 조심스럽게 다뤄야 하는 칼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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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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