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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레스 : 철학은 실용적이지 않은가?

철학을 시작하지 않는 이유

세상 사람들은 철학 공부를 시작조차 하려 하지 않는다. 이유가 무엇일까? 어려워서? 일견 옳은 이야기다. 철학은 분명 어렵다. 게임, 동영상, 수다, 맛집 탐방 등등. 세상에 재밌고 쉬운 것들이 얼마나 많던가. 이런 세상에 철학처럼 어려운 학문에 관심을 두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것이 철학을 시작조차 하지 않는 이유는 아니다. 철학이 어려운지 아닌지, 재밌는지 지루한지는 일단 책을 펼쳐봐야 알 수 있는 것이니까.


세상 사람들이 애초에 철학에 관심이 없는 이유는 따로 있다. 돈이 안 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실용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새로운 것에 호기심이 있다. 하지만 철학은 예외적이다. 철학이 새로운 것이라 하더라도 호기심이 없거나 적다. 이는 당연한 일이다. 세상 사람들의 호기심은 대체로 돈이 되는, 즉 실용적인 것을 향하게 마련이니까. 그렇게 철학은 시작부터 세상 사람들과 멀어져 갔을 테다.


아주 오래된, 철학의 오해


‘철학은 먹고 사는 데 아무 도움이 안 된다.’ 이것이 철학의 가장 오래된 오해일 테다. 흔히 철학은 우리네 일상과 동떨어진 이야기라고 여긴다. 바로 이 오해가 철학이 최소한의 호기심의 대상조차 되지 못하게 된 이유일 테다. 그렇게 철학은 시작조차 할 필요가 없는 학문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믿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철학은 실용적이며 돈이 된다. 이 낯선 이야기를 더 이어가기 위해서는 철학의 오래된 오해부터 풀어야 한다. 오해를 푸는 가장 좋은 방법은 오해의 시작점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아주 오래된 철학의 오해를 해소하기 위해 우리는 철학의 시작, 정확히는 서양철학의 시작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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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레스, 서양철학의 시작


탈레스는 지혜 추구(철학)의 시조이다. 『형이상학』 아리스토텔레스


서양철학의 시작은 탈레스다. 탈레스는 이오니아 지방의 항구도시 밀레토스(현재 터키의 영토)에서 활동했던 철학자다. (이 지역에서 활동한 철학자들을 통칭해 ‘밀레토스 학파’라고 한다.)고대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뿐만 아니라 현대철학자인 러셀 역시 “철학은 탈레스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선언한 바 있다. 탈레스는 어떻게 서양철학의 시조始祖가 될 수 있었을까? 그가 ‘형이상학形而上學, metaphysics’이라는 개념을 최초로 기초 세웠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이란 무엇일까?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여러 학문들 가운데 가장 정확한 학문은 제1의 여러 원인들을 대상으로 삼는 학문이다. 그 이유는 더 근본적인 원리에서 출발하는 학문 쪽이 파생적이고 보조적인 여러 원리로부터 출발하는 학문보다 … 더 정확하기 때문이다. … 즉 그것은 제 1의 원리나 원인을 연구하는 이론적 학문이어야 한다. 『형이상학』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가장 정확한 학문”이 바로 형이상학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형이상학은 다양한 대상들 사이에 존재하는 “더 근본적인 원리(제1의 원리 )”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형이상학形而上學, metaphysics은 말 그대로, 사물들의 특정한 형태形 너머而上에 있는 것을 탐구하는 학문學이다. 즉, 자연physics 너머meta-에 있는 것을 탐구하는 학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수증기, 이슬, 눈, 얼음 같은 다양한 사물들이 있다. 이는 각각 특정한 형태를 띠고 있다. 그런데 이 모든 형태 너머에 있는 보편적인 원리·원인이 있다. 물이다. 즉 물이라는 원리·원인이 있기 때문에 수증기, 이슬, 눈, 얼음이 존재할 수 있다. 이렇게 다양한 사물들 너머에 있는 보편적 원리·원인을 밝히려는 학문이 바로 형이상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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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상학을 기초 세운 탈레스


“인간(혹은 권력)이란 무엇인가?” 이는 전형적인 형이상학적 질문이다. 개별적 형태를 띤 존재를 넘어, 그 모든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공통적이고 보편적인 원리(이것을 ‘본질’이라 한다)를 찾으려는 학문이 바로 형이상학이기 때문이다.


‘기철·민혜·우진·수민···’ 등등 수많은 인간 속에 있는(혹은 부모의 권력, 선생의 권력, 정치인의 권력 등등 수많은 권력 속에 있는) 보편적인 원리를 찾으려는 학문이 형이상학이다. 즉 다양한 개별자들 너머에 있으면서 그 존재들을 가능하게 하는 본질을 찾으려는 학문이 바로 형이상학이다. 탈레스는 바로 이런 형이상학이라는 개념을 최초로 기초 세웠다. 이에 대해 서양 철학사를 정리한 ‘요하네스 휠스베르거’는 이렇게 말한다.


탈레스가 행한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오히려 모든 존재의 기본적인 근거라고 하는 개념이다. 이 개념은 그가 제일 처음으로 제기한 것이다. 『서양철학사』 요하네스 힐쉬베르거


휠스베르거의 말처럼, 탈레스는 “모든 존재의 기본적인 근거”(제1의 원리, 본질)을 최초로 제기했다. 형이상학을 개념화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이지만, 그 개념화의 토대를 제공한 이는 탈레스다. 탈레스는 세계와 사물에 관해 형이상학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인식의 틀을 최초로 만들었다. 탈레스는 ‘형이상학’이란 말을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지만, 이미 형이상학이란 개념을 세상에 내어놓은 셈이다. 이것이 탈레스가 서양철학의 시조로 길이 인정받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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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상학은 정말 돈이 안 되는가?


이제 우리의 오해로 돌아가자. 서양철학이 탈레스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그것은 서양철학이 형이상학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의미다. 이것이 바로 ‘철학은 돈도 안 되는 비실용적인 학문’이라는 오해의 시작이었다. ‘형이상학’을 아주 쉽게 말하자면, ‘눈에 보이는 것’(다양하고 개별적 존재들) 너머에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본질)을 탐구하는 학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흔히 돈이 된다고 믿는 학문들의 공통점이 있다. 바로 ‘눈에 보이는 것’들을 탐구하는 학문이라는 점이다. ‘기계공학 8주 완성’, ‘주식투자 완정정복’, ‘직장에서 인정받는 컴퓨터 활용법’ 이런 책들은 모두 눈에 보이는 것들에 대한 책이다. 이런 책들을 ‘실용서’라고 말한다. 책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런 ‘실용서’에 관심을 갖는 것은 흔한 일이다. 그것이 돈이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같은 주제(기계‧주식‧컴퓨터)라도 형이상학적 태도 접근하는 책들이 있다. “기계의 본질은 무엇인가?” “주식의 본질은 무엇인가?” “컴퓨터의 본질 무엇인가?” 세상 사람들은 이런 책에는 관심이 없다. 이런 책은 우리네 일상과 동떨어진 돈이 안 되는 비실용적인 책이라 믿기 때문이다. 이런 믿음은 심각한 오해다. 철학의 오래된 오해를 바로잡을 시간이다. 다시 ‘요하네스 휠스베르거’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형이상학은 특수(개별) 과학자들처럼 단지 존재의 한 부분만을 잘라내어 다루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존재 자체를 다룬다. 형이상학은 제 1의 근거를 찾아 헤맨다. 그렇게 함으로써 감춰져 있는 곤란한 영역에 까지 파고든다. 『서양철학사』 요하네스 힐쉬베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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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용서’는 전혀 실용적이지 않다.


형이상학은 실용적이지 않을까? 아니다. 오히려 흔해 빠진 ‘실용서’들이 전혀 실용적이지 않다. ‘기계공학 8주 완성’을 읽고 기계공학을 완성한 사람이 있을까? ‘주식투자 완전정복’을 읽고 주식투자를 완전히 정복한 사람이 있을까? ‘직장에서 인정받는 컴퓨터 활용법’을 읽고 직장에서 인정받은 사람이 있을까? ‘없다’고 단언할 수 있을 정도로 드물 테다.


이처럼, ‘비실용적인 실용서’라는 역설이 넘쳐나는 이유가 무엇일까? “단지 존재의 한 부분만을 잘라내어” 원하는 앎에 도달하려 했기 때문이다. 휠스베르거의 말처럼, 어느 “존재의 한 부분만 잘라내어” 알려고 했을 때 우리는 “감춰져 있는 곤란한 영역까지 파고”들기 어렵다. 즉 어떤 대상을 진정으로 알 수 없다.


돈벌이든, 실용성이든 간에 무엇인가를 진정으로 알아야 가능한 일 아닌가? ‘눈에 보이는 것’만 공부하려는 이들은 진정한 앎에 도달할 수 없다. 진정한 앎에 도달하려면 탈레스가 기초 세운 형이상학적 인식의 틀이 필요하다. 쉽게 말해,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파악하려는 태도가 필요하다.


그것은(형이상학) 실제적인 목적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앎 자체를 위해서 추구하는 그런 앎이다. 탈레스가 얻으려고 애썼던 것은 바로 이런 앎이었다. 따라서 그의 학문은 이미 보통의 지식이 아니라, 지혜이고 형이상학이고 철학이었다. 『서양철학사』 요하네스 힐쉬베르거


분명 형이상학은 오해(철학은 비실용적이야!)받을 여지가 있다. “실제적인 목적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앎 자체를 추구하는 그런 앎”이기 때문이다. 이런 학문은 얼핏 실용적이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이는 중요한 것을 놓친 관점이다. ‘형이상학적 앎’(지식이란 무엇인가?)은 ‘구체적인 앎’(논리학·수학·과학)과 상관없거나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앎 자체를 추구하는 앎”(형이상학적 앎)은 이미 구체적인 대상들을 모두 꿰뚫은 다음에 도달할 수 있는 앎이다. ‘주식투자 완전정복’을 다 읽어도 “주식의 본질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지 못할 수 있다. 하지만 “주식의 본질이란 무엇인가?”에 답할 수 있는 이들은 주식투자를 완전정복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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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실용성은 형이상학에 있다.


‘스티브 잡스’로 상징되는, 실용적이고 많은 돈을 버는 경영자들이 지극히 형이상학적인 철학책을 부여잡고 있었던 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이런 사실을 탈레스가 잘 보여주고 있다. 그가 추구했던 학문 “보통의 지식이 아니라, 지혜이고 형이상학”이었다. 그런 그는 비실용적이며 돈도 못 버는 삶을 살았을까? 아리스토텔레스는 탈레스에 관한 흥미로운 일화를 하나 이야기 한다.


탈레스는 가난하다고 비난받았는데, 아마도 사람들이 철학을 무용지물이라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천문학에 밝던 그는 이듬해에 올리브 농사가 대풍이 들 것을 예견하고, 아직 겨울인데도 갖고 있던 얼마 안 되는 돈으로 보증금으로 올리브유 짜는 모든 기구들을 싼값에 임차했다고 한다. 그 뒤 올리브 수확 철이 되어 올리브유 짜는 기구들이 갑자기 한꺼번에 많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는 임차해둔 기구들을 자신이 원하는 값에 임대하여 큰돈을 벌었다고 한다. 『정치학』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비실용적이며 돈이 안 되는 학문이라 비난받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나 보다. 형이상학을 추구하던 탈레스 역시 돈을 못 번다고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형이상학은 결코 비실용적이지 않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통찰할 수 있어야 ‘눈에 보이는 것’들을 제대로 알 수 있는 법이다. 형이상학은 구체적인 대상들을 관통하는 원리를 탐구하는 학문 아닌가? 형이상학을 추구했던 탈레스가 천문학과 경제학(올리브유 기계 독점!)에 능통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는 모든 세부 학문을 관통하는 근본 원리를 알고자 했으니까 말이다.


철학은 비실용적이어서 돈이 안 되는 학문이 아니다. 돈을 버는 것이 철학의 관심사가 아닐 뿐이다. 여기에 진정한 철학의 실용성이 있다. 돈이 전부가 아님을, 돈보다 소중한 것이 있음을 진정으로 깨닫게 해주는 앎보다 더 실용적인 앎이 어디 있겠는가. 철학은 그 시작부터 단 한 번도 비실용적이었던 적이 없다. 다만 우리가 오해했을 뿐이다. 탈레스는 철학의 시작부터 이런 사실을 잘 증명하고 있다.


탈레스는 원하기만 하면 철학자는 쉽게 부자가 될 수 있으나 그것은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라는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정치학』 아리스토텔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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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하수, 중수, 고수


형이상학, 즉 철학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삶의 하수, 중수, 고수로 나뉜다. 삶의 하수는 ‘철학은 돈이 안 된다’고 단언하는 이들이다. ‘돈’(눈에 보이는 것)만 보느라 정작 ‘철학’(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보지 못한다. 그래서 ‘돈’조차 제대로 보지 못한다. 삶의 중수는 ‘철학’의 진정으로 가치를 알아보고 그것으로 ‘돈’을 버는 이들이다. 이들이 중수인 이유는 ‘철학’의 가치를 알아봤지만 결국 ‘돈’(눈에 보이는 것)에만 머무르는 까닭이다.


삶의 고수는 어떤 이인가? 무림의 고수를 생각해 보라. 이들은 힘이 있지만 힘을 쓰지 않는다. 정확히는 힘쓰는 것에 관심이 없다. 삶의 고수 역시 마찬가지다. ‘철학’의 힘으로 ‘돈’을 벌 수 있게 되었지만 ‘돈’을 벌지 않는 이들이다. ‘돈’을 버는 것에 큰 관심이 없는 이들이다. 이들은 철학을 통해 삶의 진실에 도달해 돈 너머에 있는 소중한 것들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철학의 시작으로 돌아가, 철학의 오해를 해소할 수 있다면 우리 역시 삶의 고수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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