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다른 것들
나와 다른 존재들은 크고 작은 불편함을 준다. 나는 놀고 싶은데 부모가 공부하라고 하면 불편하다. 나는 조용히 있고 싶은데, 쉴 새 없이 떠드는 친구가 있으면 불편하다. 나는 피자를 먹고 싶은데 어머니가 된장찌개를 해놓으면 불편하다. 나는 카페에서 조용히 이야기하고 싶은데, 연인은 여행을 가자고 할 때 불편하다. 누군가의 성격, 취향, 생각이 나와 다를 때 여지없이 불편함을 느낀다.
사람만 그럴까? 아니다. 사물도 마찬가지다. 오래 쓴 아이폰 대신 안드로이드폰을 써야 하는 상황을 생각해 보자. 정보를 검색하는 것부터 친구와 대화하는 것까지 이래저래 불편한 것이 한두 개가 아니다. 이처럼 이전에 사용하던 물건 대신 새로운 물건을 사용하게 될 때 불편하다. 왜 그런가? 이전에 쓰던 물건과 지금 쓰는 물건이 다르기 때문이다. 즉 이 모든 문제는 ‘다름’ 때문에 발생한다.
다름=불편함, 같음=편안함
‘다름’은 불편함을 준다. 동시에 ‘같음’은 편안함을 준다. ‘다름’은 낯섦이고, ‘같음’은 익숙함이기 때문이다. ‘같음’은 익숙하기에 편안함을 준다. 반면 ‘다름’은 낯섦이기에 불편함을 준다. 이러한 이유로 긴 시간 ‘다름’은 악처럼 느껴져 왔다. 정치, 종교, 전쟁 등등 인류사의 큰 비극이 끊이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인가? 이는 모두 자신과 다른 존재들을 악이라고 규정하고 제거하려는 시도에서 비롯되지 않았던가.
이는 우리네 개인적인 삶에서도 반복된다. 많은 사람들은 불편하지 않고 편안하게 살고 싶어 한다. 그래서 ‘다름’을 회피하고, ‘같음’을 쫓는다. 자신과 다른 존재(물건·친구·여행지…) 대신 자신과 같은(혹은 유사한) 존재를 찾으려 한다. ‘다름’을 피해 같음을 쫓는 삶은 지속될 수 있을까? 이는 애초에 불가능한 시도다. 세상에는 나와 다른 것들이 곳곳에 존재하며 그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다름이 주는 불편함과 불쾌감을 받아들이고 살 수밖에 없는 것일까? 또한 그 때문에 끊이지 않는 갈등과 다툼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일까? 너무 성급하게 답하기 전에 물어야 한다. ‘도대체 다름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헤라클레이도스Heraclitus라는 철학자에게 구해보자. 그는 기원전 6세기 말, 그러니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다.
모든 것은 흐른다.
헤라클레이도스 철학의 핵심은 ‘변화’에 있다. 이에 관한 기록을 먼저 살펴보자. 서양 철학사를 깊이 있게 정리한 휠스베르거는 헤라클레이도스의 말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이 세계는 신이 만든 것도 아니며, 인간이 만든 것도 아니다. 이 세계란, 정도에 따라 불타오르기도 하고, 꺼지기도 하는 영원히 살아 있는 불이었으며, 현재도 그렇고 미래에도 그럴 것이다. 『서양 철학사』 요한네스 휠스베르거
헤라클레이도스는 만물의 근원이 불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세계를 구성하는 물질적 원소가 불과 관련 있다고 주장한 것이 아니다. 그는 “불의 죽음이 공기의 입장에서는 생겨남이고, 공기의 죽음이 물의 입장에서는 생겨남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헤라클레이도스는 “불타오르기도 하고, 꺼지기도 하는” 과정에서 무엇인가가 나타나고 사라지는 원리로 세상 만물을 이해한 것이다. 즉, 헤라클레이도스는 불을 세계를 구성하는 물질적 ‘요소’가 아니라 세계를 움직이는 근본적 ‘원리’로 이해한 셈이다. 불에 관한 그의 주장은 그의 철학적 핵심인 ‘변화’에 있다.
헤라클레이도스 철학의 근본 사상은 만물은 흐르며, 아무것도 한결같은 존재로 머물러 있지 않다라는 명제를 전해주고 있다. 『서양 철학사』 요한네스 휠스베르거
헤라클레이도스의 철학의 근본은 “모든 것은 흐른다”는 것이다. 즉, 세상 만물은 끊임없이 변화하기에 “아무것도 한결같은 존재로 머물러” 있을 수 없다. 헤라클레이도스는 매일 뜨는 해마저 날마다 새롭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러한 생각을 확장하여 우주 전체가 항상 변화한다는 이론을 확립하기도 했다. 그는 세계가 ‘불’과 같다고 말했지만, 그의 세계관을 깊이 들여다보면 오히려 세계는 흐르는 ‘물’과 같다.
어제의 강물과 오늘의 강물은 다르다.
헤라클레이도스에 따르면, 모든 것은 계속 움직이며 아무것도 가만히 정지해 있지 않기 때문에 세계는 흐르는 물과 같다. 실제로 헤라클레이도스는 물과 관련된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흐르는 강물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것은 같은 강물에 발을 두 번 담글 수 없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의 진정한 의미는 어떤 것들은 변화함으로써만 같아진다는 의미다.『우주의 파편들The cosmic fragments』 헤라클레이도스 저, 제프리 커크 편집
흐르는 강물이 있다고 해보자. 어제의 강물과 오늘의 강물이 다르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강물이 계속 흘렀기(변화) 때문이다. 이런 변화는 ‘다름’을 낳는다. 그래서 우리는 “같은 강물에 발을 두 번 담글 수 없다.” 강물은 끊임없이 변화하기에 항상 다른 강물이니까. 이것이 우리가 흐르는 강물을 보며 흔히 떠올리는 생각이다. 이처럼 세상 만물이 물처럼 흐른다면 ‘같음’은 어디에도 존재할 수 없다.
모든 것이 물처럼 흐르는 세상에서 같은 것은 없고 모든 것이 다른 것들이다. 쉽게 말해, 세상의 다양한 사람, 물건 중 자신과 같은 것은 없고, 온통 자신과 다른 것이다. 심지어 같은 사람, 같은 물건일지라 하더라도, 그 역시 매번 변화하기에 매 순간 달라지는 것들이다. 헤라클레이도스의 말이 옳다면, 우리는 영원히 불편함과 불쾌함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다름은 항상 불편함과 불쾌함을 불러일으키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차이(변화)의 세계 속에서 영원히 불편과 불쾌를 견디며 살아야 하는 것일까? 성격, 취향, 가치관이 다른 이들이나 낯선 것들과 부대끼며 불편하고 불쾌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헤라클레이도스는 세계는 흐르는 강물처럼 매번 변화한다고 말하며 수수께끼 같은 말을 덧붙인다.
‘다름=같음’이라는 수수께끼
“흐르는 강물의 진정한 의미는 어떤 것들은 변화함으로써만 같아진다는 의미다.” 이는 흐르는 강물이 끊임없이 변화하기에 오히려 같아진다는 말이다. 간단히 말해, 헤라클레이도스는 ‘다름=같음’이라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수수께끼 같은 사람’ 헤라클레이도스의 별명이다. 그의 별명처럼 그의 철학은 수수께끼처럼 난해하다. 난해한 수수께끼를 천천히 풀어보자.
강물은 끊임없이 흘러간다. 거기서 우리는 무엇을 볼까? 당연히 끊임없는 변화(흐름)를 본다. 하지만 흐르는 강물에서 보지 못한 것이 있다. 어느 날, 강물이 흐르지 않고 멈춰버렸다고 가정해 보자. 그때 그것을 강물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것은 강물이 아니다. 흐르지 않는 것은 강물이 아니니까. 조금 더 현실적인 예를 들어보자. 강물 옆에 수로를 파서 파이프를 연결해서 매끈하게 물을 흐르게 해보자. 그것은 강물인가? 아니다. 그것 역시 강물이라 말할 수 없다.
‘강물=강물’인 이유는 무엇인가? 즉 어제 강물을 보고 오늘 강물을 본 뒤, 그것이 모두 같은 강물이라고 판단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이 끊임없이 흘러가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매 순간 ‘다름’을 만들어내는 강물 특유의 물살의 (결코 매끈하지 않은) 출렁임 때문이다. (결코 단 한 순간도 같음으로 반복되지 않는) 그 끊임없는 ‘다름’ 있기 때문에 어제 본 그것도 강물이고 오늘 본 그것도 강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같음’은 ‘다름’에서 온다. ‘(어제) 강물=(오늘) 강물’의 ‘같음’은 매 순간의 ‘다름’에서 온다. (물결의) ‘다름’ 때문에 (강물의) ‘같음’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헤라클레도스의 말처럼, “어떤 것들은 변화함으로써만 같아진다.” 이제야, ‘다름=같음’이라는 수수께기를 이해할 수 있다. 세상 만물은 다르기 때문에 같다.
‘같음’은 변화의 경향성이다.
시험을 못 치면 슬퍼하고, 게임을 할 때 즐거워하는 친구가 있다. 매 순간 그 친구의 감정은 강물처럼 다르다. 하지만 그 ‘다름(감정)’이 바로 그 친구의 ‘같음(정체성)’을 만들어낸다. 시험을 못 쳐도 슬프고 게임을 할 때도 슬프면 그 친구는 그 친구가 아닐 테니까. 반대로 시험을 칠 때도 즐겁고, 게임을 할 때도 즐겁다면, 그 역시 그 친구가 아니다. 이제 우리의 질문으로 돌아갈 수 있다.
‘다름’은 무엇일까? ‘같음’이다. 다르기 때문에 같아지는 까닭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순간적인 변화(다름)의 경향성이 곧, ‘같음’이다. 모든 것은 매 순간 변화됨으로써 동일하게 존재하게 된다. 동일한(같은) 하루는 어떻게 존재하는가? 매일 해가 뜨고 지는 끊임없는 변화를 통해서 아닌가? 자연현상뿐만 아니라 사람 역시 마찬가지다.
떠드는 친구가 항상 떠드는 사람일 수 없다. 어머니의 된장찌개가 늘 같은 맛일 수 없다. 아버지가 늘 공부하라고 말하는 사람일 수 없다. 종종 떠들었던 그 친구는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를 볼 때는 차분했을 것이며, 종종 텁텁했던 어머니의 된장찌개는 어느 날 알싸했을 것이며, 공부하라고 다그쳤던 아버지는 아이가 아팠던 날에는 아무 말 없이 병간호를 해주었을 것이다.
이처럼, 모든 것은 순간순간마다 변한다. 바로 그 변화(다름)들이 바로 그 ‘친구‧동생‧어머니‧아버지’를 같은 ‘친구‧동생‧어머니‧아버지’이게 해준다. 그 순간적인 변화들이 만들어내는 경향성이 바로 한 사람의 ‘같음(정체성)’을 규정한다. 이 삶의 진실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자신과 다른 존재들을 인정할 수 있다.
‘나’와 완전히 같은 것은 그 어디에도 없고, 심지어 ‘나’조차도 흘러가는 강물처럼 변화하게 된다. 또한 지금 ‘나’를 슬프게 하는 존재들도 어느 순간 ‘나’를 기쁘게 하는 존재로 변할 수 있다. 심지어 ‘나’를 슬프게 하는 존재들이 변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내가 변하면 그것이 기쁨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삶의 진실을 본 이들은 다름을 조금 덜 부정적으로 보며, 그것을 인정할 수 있게 된다.
‘다름’을 긍정하는 법
그런데 ‘다름’의 소극적(수동적) 인정을 넘어 ‘다름’을 긍정하는 이들도 있다. 즉, ‘다름’을 즐거움과 유쾌함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이 있다. 자신과 다른 사람을 불쾌함보다 즐거움으로 만나는 이들도 있고, 익숙한 물건을 대신 낯선 제품을 사용하며 불편함보다 유쾌함을 느끼는 이들은 분명 존재한다. 이들은 ‘다름’을 불편·불쾌로 느끼거나 혹은 ‘다름’을 수동적으로 인정하는 이들과 무엇이 어떻게 다른 걸까?
차이는 정말로 악 그 자체였는가? 『차이와 반복』 질 들뢰즈
‘다름(차이)’에 관해 누구보다 깊이 사유한 철학자가 있다. 질 들뢰즈다. 긴 시간 악이라고 오해 받아왔던 다름(차이)을 제자리로 되돌려놓은 이는 들뢰즈였다. 그는 ‘차이’가 정말로 불쾌와 불편을 느껴야 할 악이었는지 따져 묻는다. 들뢰즈는 ‘차이’가 악이라는 것은 ‘차이’에 대한 오래된 오해일 뿐이며, ‘차이’는 오히려 생성을 위한 긍정적인 힘이라는 삶의 진실을 밝혀낸다.
차이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 차이는 만드는 어떤 것, 만들어지고 있는 어떤 것이다. 『차이와 반복』 질 들뢰즈
“차이는 (무엇인가를) 만드는 어떤 것이며, (그 무엇인가가) 만들어지고 있는 어떤 것이다. 들뢰즈에 따르면 ‘차이’는 세계(존재)를 구성하는 힘이며, 동시에 세계(존재) 그 자체이다. 즉, 모든 존재자는 ‘차이’이며, 그 ‘차이’로 인해서 발생하는 ‘반복’(역동성)으로 인해 세계가 구성된다. 들뢰즈의 난해한 말은 우리네 일상으로 얼마든지 설명할 수 있다.
한 물체의 위치에너지(힘)는 어떻게 형성되는가? 옥상에 있는 물체는 바닥에 구멍을 낼 수 있는 힘이 있다. 이 힘은 무엇인가? 그것은 지면과 옥상이라는 높이 ‘차이’에서다. 즉. 그 물체가 갖고 있는 힘은 곧 ‘차이’인 셈이다. 그뿐인가? ‘나’라는 존재는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남성(아버지)과 여성(어머니)이라는 ‘차이’에 의해서다. 이처럼, ‘차이(다름)’는 한 존재를 파괴하는 불편하고 불쾌한 부정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한 존재를 생성시킬 즐겁고 유쾌한 긍정적인 어떤 것이다.
‘차이(다름)’를 즐거움과 유쾌함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은 ‘차이’에 관한 오해를 해소한 이들이다. 그들은 자신과 다른 존재들이 자신을 파괴할 존재가 아니라 어떤 식으로든 자신을 더 나은 존재로 나아가게 할 존재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들이다. ‘다름’의 본성을 이해해서 ‘다름’의 불편·불쾌를 넘어 ‘다름’의 ‘인정’으로, 그리고 끝내는 ‘다름’의 긍정으로 나아가야 한다. 지혜란 바로 그곳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