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능한 시도, 포옹 그리고 키스
연애와 스킨십
연애를 시작하면 상대와 같이 있고 싶다. 영화도 보고, 차도 마시고, 이야기도 나누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말 그 때문에 연인과 같이 있고 싶은 걸까? 뜨거운 연애가 시작되면 스킨십을 하고 싶다. 정직하게 말해 연인과 극장에 가고, 카페에 가는 이유는 손을 잡고 싶고, 포옹하고 싶고, 키스를 하고 싶어서 일지도 모르겠다. 만약 스킨십을 원하지 않는다면, 왜 굳이 연인과 극장과 카페에 갈까? 친한 친구와도 얼마든지 극장에도 카페에도 갈 수 있는데 말이다. 연애를 할 때 상대와 같이 있고 싶은 이유는 스킨십을 원해서다.
‘왜 사랑하는 사람과 스킨십을 하고 싶을까?’ 이 질문으로부터 시작하자. 스킨십에 대한 판타지나 태도는 각자 조금씩 다를 수 있지만, 남자든 여자든 마찬가지다. 남자든 여자든 사랑하는 상대와 연애를 하게 되면 손잡고, 포옹하고, 키스하고 싶다. ‘연인이 있으면 당연히 스킨십을 하고 싶은 것 아니야?’라며 너무 당연해서 의문조차 가져 본 적 없는 질문에 한 번쯤은 답해볼 필요가 있다. 이 낯선 질문을 통해 우리가 갖고 있던 스킨십에 관한 판타지와 태도를 되돌아 볼 수 있다.
연애를 하면 궁금증이 생긴다. ‘상대를 알고 싶다’는 궁금증. 한참 연애하던 시절을 떠올려보자. 하루 종일 만나서 이야기를 했는데, 무슨 할 이야기가 또 남았는지 귀가 뜨거워질 정도로 밤새 전화통을 붙잡고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던가. 왜 그렇게 상대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을까? 상대를 알고 싶어서다. 남자 친구가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어떤 음식을 싫어하는지, 좋아하는 음악은 어떤 건지, 싫어하는 가수는 누구인지, 취미는 무엇인지 등등. 남자 친구의 모든 것을 알고 싶다. 그래서 끝도 없는 대화를 나누는 것일 게다.
‘타마라’(tamara kvesitadze)의 ‘statue of love’(사랑상)
하지만 그 많은 대화에도 불구하고 서로에 대해 모르는 지점은 늘 있게 마련이다. 심지어 서로에 대해 오해하기도 한다. 연인은 서로 직감한다. 아직 상대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는 걸. 한 사람을 정확하고 분명하게 알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건 상대방이 되어 보는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이 되어 볼 수만 있다면, 그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는지도 무엇을 싫어하는지 오해 없이 알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런데 이것이 가능할까? 만약 가능하다면 그건 어떤 의미일까? 상대방이 되어 본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가끔은 백 마디 말보다 하나의 예술작품이 생각을 더 명료하게 할 때가 있다. ‘타마라’(tamara kvesitadze)라는 예술가의 작품, ‘statue of love’(사랑상)을 찾아보자. 철사 같은 재질로 만든 거대한 두 연인이 점점 다가오더니 서로를 관통해서 지나가는 작품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지점은 연인이 서로 관통되는 지점이다. 그때가 연인이 상대방이 되어보는 순간이다. 상대가 되어본다는 건 그런 느낌일 테다. 상대방의 육체 안으로 온전히 들어가 상대를 오롯이 느껴보다는 그런 느낌.
하지만 예술 밖 현실에서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타마라’의 연인들은 관통 가능한 육체를 가졌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상대방을 가장 잘 알려면 상대방이 되어 보아야 하는데 그것이 불가능하기에 우리는 차선책을 택한다. 그 차선책은 상대와 거리를 최대한 줄이려고 하는 것이다. 관통까지는 못하더라도 관통 직전까지는 가고 싶은 것이다. 불완전하지만 그렇게라도 상대방이 되어보려는 시도라도 하고 싶은 것이다.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랑의 시도는 불가능하기에 더욱 절절하다.
불가능한 시도, 포옹 그리고 키스
상대방이 되고 싶지만 관통 불가능한 육체를 가진 죄로, 할 수 있는 것은 상대와 거리를 최대한 줄이는 것뿐이다. 그 불가능한 그래서 절절하기까지 한 시도가 바로 스킨십이다. 한참을 멀리 떨어져서 손을 잡고, 포옹하고, 키스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손을 잡고 포옹하고 키스하는 건, 상대방이 되어 그를 알고 싶다는 불가능한 시도다. 그 시도는 애초에 불가능하기에 더욱 간절해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연애를 할 때 왜 그리고 붙어있고 싶어 하는지에 대한 대답이다.
연인과 손을 잡을 때 알게 된다. 상대의 손에서 전해오는 따뜻한 체온. 그 마주 잡은 손만큼은 마치 내가 상대가 된 것 같다. 연인이 우리를 꽉 안아줄 때 알게 된다. 상대의 가슴에서 전해 오는 그 심장박동의 두근거림. 서로가 서로를 꽉 안고 있는 그 순간만큼은 내가 상대가 된 것 같다. 연인과 뜨거운 키스를 할 때 알게 된다. 연인의 입술 떨림과 혀의 감미로운 부딪힘. 누구와도 그리 가까이 접촉한 적 없는 바로 그 순간만큼은 내가 상대가 된 것 같다. 그 모든 스킨십을 통해 우리는 상대를 조금 더 알게 된 것 같다.
손을 잡고, 포옹을 하고, 키스를 할 때 느껴지는 설렘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저 동물적 본능 때문일까? 결코 가능하지 않을 것 같은 상대가 되어보려는 시도가 잠시지만 가능한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인 것은 아닐까? 마치 기적을 경험한 것과 같은 느낌은 아닐까?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다.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고 믿고 있었던 일이 현실이 되었을 때 설레지 않는 이는 없을 테니까. 뜨거운 연애를 하면 왜 그리도 상대와 찰싹 붙어 물고, 빨고, 안고 싶은지 그 이유를 알겠다. 그건 상대방이 되어 상대를 알아가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