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란 것은 결국 ‘섹스’보다 차라리 ‘애무’의 정서에 가깝지 않을까?
역설적이게 섹스는 사랑을 방해하는 행위로 기능하기도 한다.
섹스가 스킨십의 절정이라면 그 직전은 애무다. 그런데 남자든 여자든 섹스를 할 때 애무를 하지 않는 혹은 귀찮아하는 사람이 간혹 있다. 나는 감히 말하고 싶다. 애무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라고. 이런 과격한 이야기를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애무야말로 사랑이라는 것을 가장 잘 표현해주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더 진도를 빼기 전에 ‘레비나스 엠마뉘엘’이라는 철학자의 애무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올바르게 말하자면 애무를 받는 대상은 손에 닿지 않는다. 이러한 접촉에서 주어지는 손의 미지근함이나 부드러움, 이것이 애무에서 찾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애무의 추구는, 애무가 찾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그 본질로 구성한다. (중략) 애무는 거머쥘 수 없는 것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열어 주는 이러한 배고픔의 증대, 점점 더 풍요해지는 약속으로 가득 차 있다.” 「시간과 타자」
섹스는 분명 스킨십의 절정이지만 역설적이게 섹스(여기서 남자의 성기가 여자의 성기로 삽입되는 과정이라고 하자)는 사랑을 방해하는 행위로 기능하기도 한다. 서로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고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섬세하게 살피려고 했던 사람이 섹스 후에 변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왜 일까? 그건 섹스는 상대와 가장 가까이 다가가는 경험이기 때문이다. 섹스를 통해 마치 내가 상대의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고 착각하기에, 섹스 후에 더 이상 섬세하고 조심스럽게 상대를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애무하지 않는 이는 상대를 알아가려 하지 않는 이다.
아무리 상대를 알려고 해도 근본적으로 우리는 상대를 온전히 알 수 없다. 상대의 육체를 관통할 정도로 상대방이 되어 볼 수 없는 까닭이다. 그렇다면 사랑이란 것은 결국 ‘섹스’보다 차라리 ‘애무’의 정서에 가깝지 않을까? 애무가 무엇인가? 손으로 입술로 혀로 상대를 더듬는 행위 아닌가. 그래서 레비나스는 ‘애무를 받는 대상은 손에 닿지 않는다’고 또 말한 것일 테다. 이 애무는 레비나스의 말처럼 ‘애무의 추구는 애무가 찾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그 본질로 구성한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정서다. 상대를 알고 싶지만 결코 알 수 없기에 끊임없이 상대를 알아가려는 노력. 레비나스는 이러한 노력을 ‘애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노력으로 타자를 알아갈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끊임없이 더듬고 핥는 애무야말로 결코 알 수 없지만 끊임없이 상대를 알아가려는 사랑의 정서라고 말하고 싶다. 애무는 거머쥘 수 없는 것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열어주기에 점점 배고픔을 증대시키지만, 결국 점점 더 풍요로워지는 약속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애무는 사랑이기에 연애를 점점 더 풍요롭게 해준다. 애무하지 않는 이는 상대를 알아가려 하지 않는 이다. 상대를 알아가려 하지 않는 이는 상대를 사랑하지 않는 자다. 그래서 감히 이렇게 말하고 싶다. 애무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다. 사랑한다면, 애무하자!